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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Dec 07. 2021

과테말라로 - 올해의 마지막 펜팔,

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오늘 어쩐지 대본이 안 써지는 날이라 다른 걸 쓰고 싶어서 빠른(?) 답장을 쓰려 책상에 앉았어. 너는 요즘 글쓰기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했는데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일로 쓰는 글은 매일 쓰고 있지만 정작 기록을 위한 글은 거의 쓰질 못하고 있으니, 브런치에서 몰아붙이듯 써둔 '스무 번째 이사'를 보면 나 자신이 참 기특하다. (셀프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편) 얼마 전 스마트폰을 떨어트려서 디스플레이가 고장이 났어. 액정에 초록색 줄이 쫙쫙 생겨버렸거든. 그래서 유튜브를 통 보지 못했어. 네 근황도 그래서 많이 접하지 못했는데 그사이 엄청 바빴구나. 짐작하건대 너도 mbti에서 E의 외향 성향을 가진 게 분명해 보인다. ㅎㅎ 그래서 말인데 나는 요즘 mbti에 푹 빠져있어. 물론 나는 혈액형에도 푹 빠져있었고 mbti가 최초로 유행했을 때에도 밤새도록 인스타그램에서 mbti를 검색해 하트를 누르며 찬양했지. 그런데 왜 뒤늦게 또 mbti에 빠지게 됐냐면 이전에는 내 성향인 ENFP를 분석하고 좋아했다면 이젠 모든 성향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대본을 쓸 때 다양한 캐릭터를 설정해야 하잖아. 그때 mbti를 사용하니까 설정이 아주 쉽게 풀리더라고. 내가 가상의 인물을 만들고, 그 가상의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 세계관이 확장하면 확장할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서 나 스스로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걸 mbti가 이 유형은 이렇다고 해주니까 편하더라고. 어떤 이들은 mbti나 혈액형처럼 자신을 어떤 범위 안에 가두는 걸 불쾌해하던데 그 마저도 그 사람 고유의 성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나는 mbti 쳐돌이 나야 나~ (*쳐돌이란 말을 아니? 요즘 애들이 쓰는 신조어란다ㅋㅋㅋ) 그래서 다음 편지엔 네 mbti를 알려주길 바라.


네가 쓴 답장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이면의 감정은 겪지 않고서는 모르지만, 싱글의 자유로움은 잘 알아서 부럽다고 했잖아. 난 싱글의 자유로움,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잘 알지만, 그 나이 때에 겪는 기분이 모두 달라서 우리 모두는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짐작할 뿐이지. 우리 서른일곱 살에 미혼 인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 기분을 짐작하는 것뿐이지. 특히나 싱글일 때는 하루하루가 똑같이 흘러가지 않고 미래가 불명확하니까 더더욱 확신하긴 힘들지. 만약 네가 서른 중반에 시호를 낳지 않고 20대에 시호를 낳았다면 어떤 기분일까? 한국에서 가족들 가까이에서 시호를 기르고 있다면 또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본다면 모두에게 육아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다 같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직 나는 그 마음을 전혀 짐작조차도 하지 못하지만 말이야. 현재 서른일곱에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로 사는 삶. 게다가 부부 모두 일반적인 사회생활, 고정적인 급여 노동 없이 사는 삶은 함께 따르는 불안을 다스리며 충분히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서른일곱에 싱글의 미혼 생활은 어땠을까? 여전히 훈남의 새로운 남자를 상상하며 므흣한 밤을 보냈을까? 아니면 불안에 뒤척이며 알코올에 취해있었을까. 짐작이 안가네. 워낙에 내가 예상이 안 되는 삶을 살아서 말이야. ㅎㅎ

 한국은 지금 청소년에게도 '방역 패스'를 적용하기로 해서 12-18세 모두 접종자만 학원을 다닐 수가 있게 되었어. 카페 식당 도서관 미술관 같은 데도 모두 들어갈 수가 없어. 나는 백신을 맞지 않았고 현 정부의 정책에 더욱더 심통이 나서는 맞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어. 카페도 식당도 나는 갈 일이 거의 없으니까 생활에 불편함은 없어.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이런 무언의 압박이 있는 반강제 접종 정책에는 화가 너무 나더라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이라도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야. 미국도 유럽 몇 개 국가들도 방역 패스를 실행하고 있고, 그러면서 비접종 국민들과 마찰이 심하다고 알고 있어. 혹시 과테말라는 그런 문제들은 없는지 궁금하니 소식도 전해주면 좋겠어. 왜 갑자기 육아니, 청소년이니 하는 말을 길게 하느냐면 내가 어제 읽은 책이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이기 때문이야. 곧 시호는 얼마 안 있어 어린이가 될 테니까 네가 읽어보면 좋겠어. 생일선물로 받은 건데 나보다는 네 취향인 것 같아. 저자도 아이가 없는 사람이지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독서교실을 운영하나 봐. 거기서 아이들과 나눈 대화들, 아이들에게 배운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저자가 책 도입부에 이런 말을 해. 어린이 교재 편집자로 오래 일을 했지만 선뜻 어린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건, 양육자나 보호자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자격'이 될까 싶어서였다고. 자칫 잘못하면 '네가 애가 없어서 그렇다'로 끝나는 이야기가 될까 봐서 조심스러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어린이에 대해서 쓰기로 결심한 것은, 어린이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학교의 학생이지만 한 세계의 구성원이니까 그 대상으로써, 더 많은 어른들이 어린이를 배려하고 이야기하고 생각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이야. 엄청 성숙하잖아. 감동했어. 나 역시 서른일곱에 애를 낳아보지도, 양육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어린이, 작은 아이들에게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고 싶다고 생각했어. 물론 내 또래의 모든 부모들에게도. 애 키우는 거 힘든 일이다. 모르는 행복 있는 거 아는데 하기 싫다. 뭐 이런 나쁜 말들 말고, 내가 혹여나 양육권자나 교육자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이 들었어. 


네게 편지를 쓰는데 해가 다 떨어졌어. 여긴 동해라 해가 빨리 지고, 노을 시간이 길지가 않아. 해는 금세 산 뒤로 사라져 버려. 곧 우리 집을 빼곤 주위 모두가 어두워질 테니 조명을 서둘러 켜야겠어. 내년 11월이면 이 집의 계약은 종료가 돼, 그런데 근래 한국의 부동산 법이 조정이 되면서 세입자가 원할 경우 2년은 자동연장이 된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아버리지 않는 이상 4년을 살 수 있게 되는 셈인데 남편이 이 집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고 있어서, 큰 이변이 없다면 네가 한국에 들어올때에도 이 집에 살고 있을 것 같아 :)


곧 연말인데 한 살 더 먹고 서른여덟 살이 되어 답장을 받게 될까? 어쩌면 이게 서른일곱의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과테말라는 겨울에도 봄 같은 날씨니 지금쯤 파란 하늘과 거짓말 같은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고 있겠구나. 조금 이른 인사지만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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