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가 되겠어!

우아한 폐업

by 도연
아티스트가 되어야겠어


한 행사장에서 무대 감독님이 셨던 K감독님과 마주쳤다. 몇 년만의 행사장에서 낯선 인물이 된 나를 생소하게 쳐다보는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 도연 씨? 도연 씨 맞지? 어디 있다 나타난 거야? 그동안 뭐하느라 안보였어?
- 우리 진짜 힘들 때부터 같이 고생한 친구야, 매일 새벽 현장에서 우리 눈물 많이 흘렸다~ 그게 도대체 몇 년 전이야…

나는 그동안 일이 힘들고, 사람에 지쳐 서울을 떠났었노라고, 디자인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디자인을 포기할 기로에 서있었노라고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내 손에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이도연'의 명함이 들려있었다. 오랜 시간 책임감 있게 일해왔던 친구라며 회사 직원들에게 소개해주었고 프로젝트 하나를 맡겨주었다.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는 것 같던 나의 시간과 노력들이 헛된 일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뭉클하다. 좋은 디자인을 하고 성공을 하는 것보다, 누군가는 기억해주는 것, 누군가는 인정해주는 것, 그것을 바라 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K 대표님과의 인연으로 글로벌 기업 G사의 이벤트 행사를 맡게 되었다. 그 일로 자주 G사의 사옥에 미팅을 다녔다. 강남의 한복판에 있던 G사의 사옥은 하늘이 곧 잡힐만큼 높고, 멋있었다. 일의 규모가 큰 만큼 부담감과 책임감을 안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은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지난 시간들을, 인정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잘 해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일은 후반부로 갈수록 미팅이 잦아졌고, 본사 담당자가 유독 깐깐하게 굴었고, 여태 혼자만 했던 작업에 익숙했던 난,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여럿이 하는 작업의 전체를 기획하고 움직이는 일이 힘에 부치고 있었다. 남자 보는 눈만 없는 줄 알았지, 클라이언트* 마음을 이렇게도 못 읽는 사람이구나,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 팀은 행사를 일주일 앞두고 계약 취소 통보를 받았다.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디자인이 섹시하지 않다"라고 했다. 열심히 했지만 섹시하지 않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섹시함이란 것이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란 걸 잘 안다. 하지만 이거 빼라 저거 빼라 이색으로 바꿔라 저색으로 바꿔라, 하더니 결국 우리 팀을 빼고 다른 팀으로 대체한 것은 정말이지 화가 났다.


- 우리, 지금이야 젊고, 어디서 굴러도 아직은 괜찮지만 40살쯤 돼서도 이렇게 일해야 할까요?

우리 같은 직업은 아티스트가 되어야 존중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아티스트가 되어야 내 의견을 존중받으면서 일하고, 그게 곧 내 작품이 되어 남는 거잖아요. 지금은 시바, 늘려라 줄여라 쪼개라 붙여라, 그러니까 일이 끝나고 나선 내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일해주고 돈 받는 기계 같아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회의감이 들었다. 하루 이틀 하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한 두 번 까여본 게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다 잘못한 것 같았다. 잠도 안 오고 겨우 잠이 들면 악몽을 자주 꿨다. 호기롭게 사업을 시작하고 큰 프로젝트를 맡으며 성공행 하이패스 티켓을 손에 쥔 줄 알았다. 앞으로 돈을 버는 일만 남은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만족할 것인지, 비용을 창출하는 활동을 할 것인지 노선을 분명히 해야 했다. 나는 어쩌면 쉬운 일만 하면서 돈은 많이 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대론 안된다. 존중받는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클라이언트의 것을 이미지화시켜주는 단순 프로그래머가 아닌, 존중받는 아티스트가 되어야겠다. 내가 내 것을 만들고, 그들이 내 것을 사갈 수 있도록. 시급이 아닌, 나의 가치만큼 돈을 버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돈 버는 기계가 아닌, 아티스트이고 싶다.





* 클라이언트 : (Client) 의뢰인, 광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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