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폐업
디지털 노마드 : 여행하며 일하기
치앙마이에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다. 하루를 가득 채울수록 시간은 더 빨리 증발해버리는 것 같다. 시간을 잡는 방법은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뿐일까, 더디게 늙고 싶다... 치앙마이로 한달 살이를 떠난 E와 J는 자신들의 방향에 대해 한 달여를 깊이 고민하며 여행에서 돌아왔다. 올해 서른이 된 둘, 고민도, 생각도 많겠지. 서른넷이나 먹은 나도 매일 고민과 생각의 연속이니까. 치앙마이에서 셀카를 한 장 보내왔다. 둘은 검게 그을렸지만 그곳에서 그녀들은 눈부시게 예뻤다. 행복하구나 너희들.
8년 전, E와 둘이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E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 언니, 저 사실은 대학원 준비 중이에요. 곧 회사를 퇴사할 것 같아요.
언니한테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지금 하고 있는 UI, UX*를 조금 더 심도 있게 공부를 하고 싶어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주어 언니로서, 직장 선배로써도 많이 고맙고 대견했다. 그녀가 가졌을 불안함 같은 것은 전혀 모른 채, 퇴사를 축하했다. 나중에 E의 블로그를 통해 그녀가 했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나 왜 자꾸 남들보다 뒤처질까, 학비로 사업을 할 걸 그랬나..' 그러길 몇 년, 그녀는 Y대 석사모를 쓰고 졸업했다. 그녀는 갑자기 이번에는 세계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디지털 노마드*를 시작하겠다면서 세계여행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고 했다. 도대체 이 아이의 용감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겨우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것만으로도 큰 업적을 이룬 것 같이 느껴지던 나의 20대가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물 안 개구리, 그녀는 나와 달리 세계를 향해 걷고 있었다.
가끔 E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 SNS를 보면 그녀는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는 이야길 자주 써 놓았고, 엄마가 김치를 가지고 스페인에 왔다는 이야기를 자랑했다. 그녀는 태국에서 몇 달간을 머무르다 유럽으로 떠나는 찰나였다. 그때쯤이었나 내가 "해외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해외지사가 있는 회사나 한국의 디자이너가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들을 구직사이트에서, 마치 들키면 안 되는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슬쩍 훔쳐보곤 했다. 난 아무래도 내심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E는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네이티브 스피커 급의 영어실력과 함께. 디자인 사무실들을 돌아다니며 각국의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했고 열띤 회의를 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그녀. 너무나도 용기 있는 사람임이 확실했다. 그녀는 뒤쳐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FINISH 지점을 더 길게 잡고 있었던 거다. 내가 100미터 피니쉬 지점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면 그녀는 3000미터 장거리 골인 지점을 향해 천천히 뛰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우리보다 더 호흡이 길고 안정적이며 적당한 속도를 낼 줄 아는, 마라토너가 된 셈이다. 몇 년이 흘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은 늘 갈증이 난다고 했다. 밤낮, 주말 없이 독촉하는 담당자*에게, 자꾸 돈을 깎아대는 클라이언트에게, 악행을 답습하는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의 디자인 업무 시스템에 질려버렸다고. 그래서 다시 그녀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E처럼 세계 각국을 돌며 다양한 국가의 디자이너들, 클라이언트 들과 일을 했다면,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칵테일을 마시고, 그리고 돌아와 일을 하는 생활을 해봤다면, 나였더라도, 한국에서 디자이너로써의 생활을 못 견디지 않을까? 지금 한국에서 프리랜서 디자인들은 칵테일이 아닌, 카페인에 의존해 일을 하고, 수영은 커녕 수명이 줄고 있다. 새로운 일을 도모하며 함께 파이팅을 외쳤지만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가 그녀의 선택에 어떤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나에게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응원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새로 하는 일에 투자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는 든든한 멘트를 날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애초에 시작했던 디자인 시바의 일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대도 틀린 길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가까워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남들과 내가 같은 길을 가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의 마라톤이 경쟁이 된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길을, 우리만의 골인 지점을 향해 쉬다 걷다 뛰다 하면서 우직하게 나아가길 바란다.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장거리 달리기를 응원한다. Good Luck!
*ui / ux : User interface / User Experience
*디지털 노마드 digital nomad : 일과 주거에 있어 유목민(nomad)처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도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들을 뜻한다.
*담당자 :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기획자를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