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순위, 뭣이 중헌디!

우아한 폐업

by 도연



우선순위 : 뭣이 중헌디!


J가 직전에 다닌 회사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담긴 공간들을 오픈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오픈을 대비해 홈페이지와 로고, 그리고 패키지 디자인 시안을 미리 잡아 놓는 것이 업무였다. 그런데 1년을 넘게 기다려도 오픈은 결국 하지 못했다. 대표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투자를 받으러 다녔고, 번번이 투자를 받는 일에 실패했다. 결국 만들어 놓은 디자인도 쓸모없게 돼버렸다. 점점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분위기가 늘어졌다. 그러면서 그중 절반이 퇴사했다고 한다. 수억의 투자를 받아 멋들어진 건물을 짓는 것. 억대의 투자비가 들어간 넓고 큰 공간만이 J의 꿈은 아니었다.


프로젝트가 시작하면 '디자인부터 뽑아봐, 홈페이지 만들어 두자.' 하다가 프로젝트가 중도에 취소되면 휴짓조각이 되어버리는 디자인이 많다. 실무를 하면서 이런 과정에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해가 안 되는 몇 가지의 관행들이 있었다. 어떤 프로젝트가 시작하게 되었을 때 백지상태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부터 뽑아봐.’ 하는 잘못된 관행이 그중 하나였다. 기획도 없고, 콘셉트도 없는 상태에서 '로고랑 포스터부터 하나 만들자.'라고 한다. 뭘 만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디자이너는 자판기가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디자이너가 자판기라고 치자, 그렇다면 최소한 자판기는 돈을 넣어야 물건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일단 로고와 포스터가 나오면 콘셉트를 입혀 사업을 시작하곤 했다. 그리곤 그 사업이 곧장 망한다. 디자인이 별로라서 망했다고 했다. 그에 반해 경쟁사의 사업은 성공했다. 경쟁사 포스터를 회의시간에 보여주며 대표는 말한다.

- 정말 엄청난 디자인 아니냐? 너네도 이렇게 좀 해봐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막상 내 회사 로고를 만들려니 귀찮다. 그래서 대충 했다. 돈 받고 만드는 작업 가이드의 10/1로 내용을 축소하고 그까짓 거 대~충 당장 쓸 수 있을 정도로만 텍스트로만 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함께 일을 하기로 한 멤버들은 모두 그래픽 디자이너이고, 꽤 높은 작업 비용을 받고 로고를 만들어주는 전문 디자이너다. 나는 어떻게 노모드 디자인을 사업화할지, 어떤 기업에 나의 디자인을 팔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홍보를 해야 하는지, 누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이 디자인을 먼저 시작하지는 않았다. 사업자 등록증을 내고 한참이 지난 뒤, 아무래도 이쯤 돼서는 로고가 필요할 것 같아서 한 시간 만에 만들었다. 로고 디자인이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색상을 쓰고 어떤 폰트를 썼냐에 따라서 이미지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사업의 승패를 결정하진 않는다. 회사를 다니며 실패하는 사업과 성공하는 사업에는 기획과 운영, 홍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디자인은 기획이 잘 나온다면 저절로 따라온다.


J와 내가 카페를 오픈하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는 커피를 배우고, 어떻게 공간을 구성할지, 그리고 어떤 콘텐츠를 담을지, 월세를 넘어선 수익은 얼마나 창출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논한다. 세금처리는 어떻게 하면 될지, 그리고 추후의 진행방향에 대해서 매일 대화한다. 나는 회사소개서와 사업계획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J는 카페의 인테리어와 카페 구매 물품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J야 그런데, 우리 일회용 컵을 사야 할까? 아 _ 내가 너무 소박한 질문을 했지? 중요한 건 이게 아닌가?
- 여태 저는 디자인을 늘 먼저 했어요. 매번 사업이 시작되면 로고를 만들고 홈페이지를 만들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요, 디자인은 정말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풀어내는지가 중요한 거지.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가 일회용 컵을 사야 할지 말지 결정하는 일이 지금 단계에서는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요?



그렇다.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 머릿속을 정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일의 순서를 다시 정하기로 했다. 계획이 먼저, 그다음이 비주얼. 나는 디자이너지만,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 디자인은 필요한 순간에 시작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디자인이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디자이너가 자판기라고 치자, 그렇다면 최소한 자판기는 돈을 넣어야 물건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의 이전글우주의 기운이 나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