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폐업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로
프리랜서 디자인을 하다 보면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집에서는 도무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일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대게 분위기 때문인데, 침대를 보면 눕고 싶고 티비를 보면 전원버튼을 누르고 싶다. 냉장고를 보면 뭘 꺼내먹고 싶고, 일을 할라치면 설겆이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일을 할 때만큼은 방을 정돈하고 책상에 앉아 작업할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책상은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테이블 정도로만 쓰이다가 이번에야말로 방 구조를 바꾸고 책상을 정리하고 의자도 들여놓았다. 한데, 역시나 일은 잘 손에 잡히질 않는다. 사무실을 구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장 사무실을 알아보고 계약을 하자니 매달 나가는 월세도 걱정이고 텅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느니 차라리 카페로 가는 게 낫고, 카페를 가자니 커피 한 잔으로 몇 시간을 버티기엔 배가 고프고 좀이 쑤셨다.
J와 공간을 만들기 전, 얼마간의 시간동안은 여러사람이 공동 작업을 하거나, 모여서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는 쉐어형 사무실을 알아보기로 했다. 부동산 직거래 카페들에서 사진을 보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서 일을 하기엔 불편하고 답답할 것 같았다. 회사가 싫어서 뛰쳐나왔는데 회사를 다시 가는 느낌이랄까. 월에 2-30만 원 선의 쉐어형 사무실들이 꽤나 많은 걸로 보아하니, 나처럼 월세를 절감하고자 하는 회사와 프리랜서들이 많은 것 같았다. 쉐어하우스 같은 개념. 요즘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수익을 창출하며 살아가는구나.
부동산 카페를 전전하다, 어떤 제목에 눈길이 갔다.
"웹에이전시, 개발자나 디자이너 환영"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 사무실이 생겼다. 겨우 책상 자리 하나지만, 손님을 초대해 미팅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나가 편하게 글을 쓰거나 일을 할 수 있는 공간, 외롭지 않게 집중할 수 있는 사무실, 답답하면 바람도 쐬고 밥 먹고 다시 들어올 수 있는 자유로운 카페 분위기의 내자리가 생겼다. 그것도 단돈 오 만원에.
최근 얼마간 일이 잘-풀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떤 좋은 기운들이 나를 향해 빛을 쏘아대고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잘 될거라는 확신이 들기도 하지만 절대로 방심하거나 취해있지 않기로 한다. 언제나 조심스럽고, 차분하기로 다짐한다. 회사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한 건,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결심은 정말 잘 한일인 것 같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엄청나게 좌절하기도 하고 실패자 같아서 부끄러워 땅만 보고 걷는 날도 숱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끝날 때 까지 끝난 것도 아니고, 앞으로 좋은 날이 더 많을거라고 믿는다. 며칠 전, 가족여행에서 엄마와 나눈 대화가 내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 엄마가 살아 보니 결국엔 좋은 날이 오더라, 마냥 끝인 것 같던 날들도, 그날들을 참아내고 보니, 좋은 날이 오더라. 너희들을 힘들게 키웠지만 이렇게 같이 좋은 곳으로 여행도 오고, 요즘은 너무 행복해. 그러니까 매 순간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살 날이 많잖니.
지금도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날마다 나의 꿈을 생각하는 밤들이 즐겁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을 할 수 있음에 더없이 감사하다. 엄마한테 자랑스러운 성공한 막내딸이 될 수 있는, 더 좋은 날 곧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