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폐업
슈퍼 을의 을질!
카페의 매출은 기대에 못미치고 있지만 노모드 디자인은 나름대로 수월하게 순향하고 있다. 큰일 작은일 가려가며 받지 않고, 업종에 관계없이 노모드 디자인을 찾는 곳이라면 달려가 미팅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일주일에 삼일정도 카페로 출근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철, 버스를 타며 도로에서 시간을 보냈다. 미팅이 다 끝나고 오후 7시가 넘어서야 카페로 돌아와 첫 끼니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바쁜 일정이었다. 그런데 일을 많이 하면서,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프리랜서로 혼자서 일을 할 때와 사업자 등록증이 있는 회사로써 일을 할 때, 분명히 다른 업무룰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J라는 인테리어 관련 업체가 노모드 디자인과 함께 일을 해보고 싶노라고 요청이 들어왔다. 이 회사는 메인 브랜드를 주축으로 계열사 브랜드가 몇 개 있다. 그 중 천연소재를 컨셉으로 한 브랜드가 올해 인테리어 박람회에 참가를 할 예정이며, 강남 한복판에 쇼룸도 오픈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럴려면 실행시킬 디자인 팀이 필요했고 노모드 디자인이 그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회사의 상무님이란 분이 회장님의 아드님인데(이때부터 좀 등골이 싸했다만) 노모드 디자인 사무실을 한번 와봐야겠다며 호피폴라를 방문하고 나선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당장 앞으로 함께 일을 하면 좋겠다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선 먼저 해야할 일은 천연소재 컨셉인 브랜드의 웹사이트와 홍보동영상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제작에 관한 계약서를 만들어 보냈는데 회사에서는 기획서가 나오면 계약을 진행하자고 했고, 이번에 잘 보여야 앞으로 지속적으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계약 전에 기획서 제작을 시작했다. 동영상 제작 기획서에는 외주 인력까지 투입했다. E가 전체 기획을 하고, 촬영이 필요한 영상이라 촬영팀도 섭외하고 외주 인력들의 스케쥴과 견적까지 모두 상세히 계획하였다. 기획서를 보내고 계약서를 또 보냈지만 계약서는 날인이 찍히지 않은 채로 돌아왔다. 우리가 보낸 기획서를 토대로 또 미팅, 그리고 수정, 또 미팅, 그리고 또 수정...
착수금 없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 능률도 떨어질 뿐더러 일이 끝났을 때 클라이언트의 태도가 돌변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사업자 등록증을 내고 회사 대 회사로 일을 하면서 당당히 비용을 요구하고 작업자의 권리를 찾고자 했었는데 막상 회사를 만들고 일을 해보니, 개인 프리랜서보다도 더 권리는 찾기가 힘들었다. 자본금이 없는 1인 기업이라 다음 계약을 위해 제대로 된 요구를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천연소재 브랜드는 최종으로 기획서가 나오자, 견적을 수정해주면 계약서에 도장을 찍겠다고 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금액을 낮추고 마지막 계약서를 보냈고 날인 찍힌 계약서를 등기로 배송받았다. 그 동안 나는 웹사이트 제작을 시작했고 웹퍼블리셔*도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착수금이 입금 되지 않았다. 담당하던 디자인 팀장에게 연락을 해봐도 지금 너무 바빠서 그쪽 업무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는 말만 반복했고 상무님과 직접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상무님도 연락이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입금은 곧 해줄테니 일은 계속 진행하라는 메세지 한통이 전부였다. 착수금은 150만원 정도였는데, 150만원이 간절해보이고 싶지 않은데, 간절해보이는 내가, 간절한 마음과 상황을 자꾸 들키는 것 같아 구질구질하게만 느껴졌다. 착수금에 연연해하지 않고, 웹사이트를 만들어주고, 외주 인력을 꾸려 영상을 제작하고 제대로 납품한다면, 나는 과연 이 회사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강남 한복판에 쇼룸을 기획하고 박람회 디자인을 하면서 노모드 디자인은 이 브랜드와 승승장구 할 수 있을까? 작업료는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까? 10평도 안되는 작은 사무실을 가진 회사와의 약속을 매번 어기고, 자신들의 이득만을 취하려 하는 회장님의 아들과, 웹사이트 제작에는 관심이 없는 담당자와 함께 나는 과연 같이 일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노모드 디자인은 자금력이 좋은 큰 기업은 아니지만 프리랜서 서넛이서 각자의 업무를 하고, 필요에 따라 외부 인력과 함께 팀을 꾸려 일을 진행하는 형태의 팀이다. 나 역시도 생판 모르는 회사에서 봉사활동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기획서 한 장을 써도 비용을 주고 그들의 시간을 사서 사용한다. 약속을 번번히 어기고 개인의 시간과 능력을 비용으로 환산해주지 않는 회사와는 더이상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 열정페이는 이미 20대에 많이 받았고 봉사활동도 할만큼 했다. 이젠 열정페이 말고 내가 가진 능력과 가치만큼 돈을 벌고 싶다.
계약서 상 착수금 일자가 지났고 진행이 되지 않자, 계약서 효력이 상실했으므로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계약을 파기한다는 이메일을 정중하게 써서 보냈다. 당장 입금을 하겠다는 식으로 연락이 왔고 한동안 상무님이나 팀장에게 자주 전화가 와서 다시 같이 일하자며 연락이 왔었지만 이미 우리의 계약은 효력이 다했다고 거절했다.
갑질은 시원하게 을질로 되갚아주었다.
열정페이는 이미 20대에 많이 받았고 봉사활동도 할만큼 했다. 이젠 열정페이 말고 정말 능력과 가치만큼 돈을 벌고 싶다.
영상 기획서를 만들어준 E에게 기획서 작업료를 송금 해줬다. 고생해줬는데 일을 성사시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E는 내가 그 브랜드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한 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미안해했지만,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 넌 당연히 받을 돈을 받는 거야. 실행이 되지 않아 비용은 터무니 없이 작지만, 도와줘서 고마워. 이걸로 맛있는 밥이나 사먹어!
이 일로 인해서 강남으로 미팅을 다니며 했던 내 시간과 노력 비용들이 너무 아깝고 분했지만 별 수 없었다. 앞으로 받을 스트레스에 비하면 빨리 그만두는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잘 한 결정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기획서도 함부로 주는 게 아니란 걸 배웠다. 계약이 깨질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기획서로 다른 업체와 계약을 채결할 수도 있는 일이니, 앞으로는 계약서 상에도 기획서에 대한 비용과 기획서 저작권에 대한 표기를 해야겠다고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한가지를 배워간다.
*웹퍼블리셔: 디자인하고 웹코딩한 것을 웹표준성과 웹접근성에 부합하도록 재정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