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폐업 : Epilogue
스물넷에 박스 몇 개와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고, X의 차를 얻어 타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많이 왔었어요. 수 십 개의 이력서를 뿌리고 미로처럼 얽힌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손에 꼭 쥐고 면접을 보러 다녔습니다. 어찌어찌하여 취업도 했습니다. 지하철 1호선 막차를 타고 퇴근하는 길은 왜 이리 어둡고 매캐했는지, 반지하 주택에 곰팡이는 왜 이리 빨리 번지는지, 현실이 너무 지옥 같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은 또 왜 이리 많이 나는 건지. 고향에선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여기에서 나는 얼마나 촌스럽게만 느껴지던지. 그러길 10년, 서울에 온 지 꼬박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서울을 몇 번이나 떠났다 돌아왔습니다. 매일 꿈이 헤지도록 펼쳐고 덮기를 반복했습니다. 서른다섯의 저는, 이젠 현실, 그런 것 따위로 울지 않습니다. 지하철을 타면서도, 디자인을 하면서도 울지 않습니다. 대신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아름다운 영화를 볼 때, 사랑이야기를 들을 때, 사랑하는 이들이 눈물 지을 때만 눈물 흘립니다. 어느새 서울은 편안한 도시가 되었고, 나의 집이 되었고 좋은 사람이 많은 따뜻한 세상이란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10년 동안 저는 디자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고, 제 이름 석자가 찍힌 디자인 사업자도 하나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게스트하우스, 카페도 운영해봤죠. 그리도 좋아하던 글을 써서 책도 한 권 출간했습니다. 많은 국가를 섭렵하며 여행을 하진 못해도 배낭을 메고 오랫동안 머무르는 여행들을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힘을 빼고, 나른하고 게으르게 살자고 많은 책에서 얘기하지만 언제나 자신에게 무리하고 이를 꽉 깨물며 살았습니다. 한데 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가진 것이 없습니다. 월세 살이도 여전하고 함께 서울로 왔던 강아지마저도 노견이 되어 내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릅니다. 적금 통장은 없지만, 따스함이 필요한 이웃들을 도울 정기 후원 계좌가 있고, 따스함을 필요로 할 때 온기를 베풀어줄 이웃들과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전혀 모자라지 않은 삶이네요. 아니, 너무나도 풍족한 삶인 것 같아요.
나의 10년 동안의 시간과 경험들은 절대로 은행 빚으론 살 수 없습니다. 풍부한 경험, 좋은 사람, 충만한 마음을 은행에선 대출해주지 않으니까요. 카페를 1년 만에 폐업했고 거창했던 포부와 달리 디자인 사업도 그리 잘 돼가고 있지 않지만 실패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 이 시간들을 뒤돌아 본다면 아주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시간이라며 기억할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조금 더 무리할게요. 조금 더 힘을 쓸게요.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아볼게요.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 보며 그때의 무리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웃을 수 있는 날까지! 우리, 조금만 더 무리하면서 살아볼까요? 좋은 날, 분명히 올거에요. Good Luck!
우아한 폐업은 호피폴라의 폐업과 함께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조금만 더 무리하면서 살아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