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간호사는 피를 뽑는데
바늘을 찌르고도
1 분 내내 여기저기 더 찔러대면서
피가 안 나온다고 하소연한다.
혈관을 내어주고
꼼짝 못 하고 있는 나에게.
자신의 피가 뽑히는 상황에 있는 나에게도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가능성의
통제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누구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내가 그 프레임에서 상황적으로 다치는 쪽이면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나는 불필요한 상실을 겪는 것이다.
그는 누가 보상해주는 문제를 넘어서는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일까.
화가 났기에
문을 쾅하고 닫고
들어온 세상은
한 면의 창문과
3 면의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이라 부르는 곳일
뿐이다.
이런 곳은 썩 위로가 되지 않는다.
시끄럽게도
저 바깥의 소리가
혼란의 밥을 짓는 향기에
배가 고픈 게 자존심 상하지만
늘 풍족하고
시끄러워도 모여 있는 사람들이
있겠다는 곳이
흔히 말하는 Reality에 더 가깝다.
현실.
그 찬란하고
고귀한 종속이 불편해서
분리됨을 택한다 해도
이미 얽혀있는 지도를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거대한 자기장 속에서 파리가
나가려고 파닥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
다치는 건 파리라는 것은
저항하며 다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파리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멈추지 않으면
그 자기장을 나올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잠재적 힘일 테니까.
그 희망 때문에 멈출 수도 없다.
그러나
다치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프고, 화나고, 미안하다."
여러 의미에서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님에도
좋아한다는 것과
싫어한다는 것 사이의
모호한
말로 형연할 수 없는
영역에서
잡고 있을 사람도
잃어버릴 사람도 없는데
그럼에도
주민등록증 하나쯤은 가진
투명 인간은
방금 지불한 계산서의 이름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안녕히 가시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의 청자도 화자도 없는
그 적막한 fact는
이내 잊히고
아직은 죽지 않은
내 의식만 남아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공명하지 않겠다는 벽에 대고
묻는다.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Nothing really happened, m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