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sufficiently loved ones
아무도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는 말은
내가 원한다는 걸 말을 했을 때 제발 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말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제발 한 번이라도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는 쪽을 선호했겠지만.
이 말을 하는 주체와 객체는
매번 주객이 전도되는 바람에
서로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각자의 불충분했던 사랑을 완성하려고 의도한다.
그러나
타인의 의도를 충족해주기에는
각자의 기억 속에는
충분하게 사랑받은 적 없는
아이가 버티고 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존재는
이러한 패턴을 이해하지 않을 사람이 많은 세상은
좋은 것이다. 끌어오고 싶지도, 끌려오지도 않을
그들의 사랑 “아는” 세상을 축복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미 내 축복을 넘어선
축복 속에 산다. 축복이라 정의하든 안 하든.
없다고 생각하면 있던 것도 사라졌다.
있다고 여긴다고 해서
그들이 내가 원하겠다는
대상은 결코 되지 않았지만.
(이 부분이 늘 힘이 빠졌다)
한 번뿐이라는 인생이
새삼 무섭게 다가온다.
타인을 향한 비합리적인 요구로 물든 내가
갑자기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럴 생각이 없는 타인에게
구걸하는 사랑을 거두면
나를 필요로 하는 타인에게
짧고 불충분한 내 사랑도 소용될 것이다.
불충분하지만 그 둘이 혹은 그 다수가 모이면
불충분한 사랑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이다.
이제 그만 짝사랑하고
그래서 나를 해치는 정서를 덜어내고
두렵고 막막한 항해를 떠날 것이다.
내 안의 아이가 아직도
”일그러진 영웅”이라도 될 것처럼
“누구의 누구”라는 명예를 지켜보려고
서성대지만
그 “누구”도, 누구의 “누구”도
이미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없는 바람에
가까운 이에게 투영한 자아가
시간에 비례해 무거워진다.
물에 젖은 솜만 같다.
30 년을 끌고 다니니
너무 무겁다.
원하든 안 원하든.
때론 강제적 개념이 필요하다.
그가 없으면 사실상 변화야말로
망상일 테니까.
선택과 그에 따르는 무서움은
이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에 따라오는 성취도
이 개인의 소유이다.
내가 아니었던 나로 살면서
내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이
불충분하지만 소용 있는 사랑으로 거듭나는 것을
목격하고 싶다.
한 번 눈 감으면 만나지 못할 모든 모습들을
매일
매일
못 본 척하는 습관을 버리고
희미해지는 추억을 안고
익숙한 진부함을 “그래도” 직면하면서
불충분한 연료라도
나의 의지가 살아있으면
결코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합니Day
충분하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