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가 있다.
이럴 땐 나만이 나와 솔직해질 수 있고,
이럴 땐 나만큼 위로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이럴 땐 부족할 수도 있는 나를
내가 안아줄 아량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야 했고,
그래서 나이가 들었으며
그래도 힘든 것은
아직도 우는 나를 달래는 것이었다.
이럴 때 마주하는 자신은 처음 본 얼굴을 하고 있다.
혹은 "얼굴이 없다"에 더
가까웠다.
지구 위의 특정 국가에서
1980년 중 후반을 기점으로 태어나서
떠밀려 산 것 같은 마음을 달래주다 보면
한국도 아닌,
그렇다고 다른 나라도 아닌 곳에서
표류하는 자신을 마주한다.
베이비 부머 세대처럼
”일단” 결혼으로 뛰어들 수도 없고,
X세대의 잔상에서 벗어난 것도 아닌,
세대 변화의 절묘한 환절기에 있는
Millenials(밀레니얼 세대)
a.k.a. GenerationY
그러나 세대를 구분하는 알파벳을 넘어서
인간 모두는
개인 인생에서
사회가 수천 년에 걸쳐 겪은 세대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 내고 있다.
평균 70년이라는 축소판에서.
이러한 우리들은 그렇게 자기의 근원이 궁금하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그게 첫 오류였는지도 모른다.
자기 괴리와의 긴 싸움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러나 막을 수가 없었으니, 멈출 수도 없을 뿐이다.
그리고 결코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라는 개념이 지금 와서 나를 즐겁게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부터 내가 아닌지 찾다 보면
표현해내지 못해 품은 염증이 곪아 터진다.
10대가 겪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때로는
자기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외롭고 고독하게 침전하곤 한다.
그리하여 난 상처는 맹장쯤은 거뜬히 내보낸다.
동네 의사 세 명은 맹장 터진 것만큼은 아니라며
장염이라고 집으로 보낸다.
맹장이 터져서 염증이 배 안에서
그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동안,
나는 “의미없이 처방된” 약을 먹고, 피자를 먹고,
소위 말하는 "좋은 생각"을 하며 꼬박 일주일을
보낸다.
어쩌면 마음의 고통이 컸기에
맹장염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7일이 지나고, 나는 나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죽느냐, 내 발로 수술실에 걸어 들어가느냐
맨 정신으로 내가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건 꽤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내가 병원에 가지만 않으면
나는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다고 울던 아이는
빠른 현실 직시와 함께
자기 발로 수술실로 걸어 들어가서
배를 째야 할 것 같다고 선포를 하고,
그제야 의사들은
내가 아프다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는
내 배를 가를 칼을 고른다.
놀. 라워라..
죽고 싶다던 아이가 살려고 수술대에 오르는 것도
놀랍고,
맹장염만큼은 아니라던
같은 선서를 하고 같은 색 가운을 입은 전문가들이
맹장염의 염증이 온 배 안에 퍼져서
복막염이 되었다고
당장 수술방을 잡는 상황도.
놀라웠다..
여기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했을까.
보이는 것이 전부라 여기는 의사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는
맹장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아픔을 참을 줄 아는
상처라는 염증으로 가득한 아이라서
그를 참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지 않았다.
알렉시스 카렐은 말한다.
시야가 좁은 전문가만큼 위험한 건 없다고.
이 말에 크게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특정한 상황에서 “죽겠다” 고 선언하는 프레임은
말로서 그 상황을 중화하려는
인간의 극단적인 감정 응급 처치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Death는 관념에 그쳐 있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인간이 환상할 수 있는 Idea라는 것을.
그리고 Idea는 실재가 아니다.
실재는
진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삶”을 선택하는 인간의 본능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90 분이 지나고
200 ml의 염증”물”이
배 밖으로 나왔다.
난 그때 죽지 않았다.
동네 의사들은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정녕 인생은 운에 가까운 것일까.
개인의 내적인 노력과 무관한 방식으로.
내적인 고뇌와 관계없는 방식으로.
인생은 완전히 나를 위한 것만 같이 만만하다가도
한 순간에 나의 실존과 이상 사이에서
뭐가 중요했는지 일깨워주는 사건을 만나게 했다.
내가 내 존재를 의문하고 고뇌하기 이전에
그 뇌를 품고 있는 몸이 있었다는 것.
내가 의심하겠다는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
“건강한 신체”라는 사실을.
건강한 신체가 환상하는 죽음은
상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상은
다시 “건강한 신체”라는
조건으로
귀결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