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시야를 가린다
상대적으로
내가 길들여진 언어를
나와 같은 속도로
설명해내지 못하는 상대들을
만날 때
마치 난 아이를 대하듯
그들에 상대한 일시적 보호 권한을
나 자신에게 부여하곤 했다.
그들의 의향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그렇게 그들이 하려는 말을
내 식대로 해석해내다 보면
언어로 치환되지 않는 부분에서
이미 그들과 나는
인류 보편성 영향의 아래에 있는
“같은” 존재 임을 선명하게 깨닫는다.
실제로 언어를 통한 대화 속도보다
언어가 사용되기 직전
서로의 chemistry 가 서로에게
언어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내가 안다는 것에 너무 빠져 있으면
그들이 창조하려는 자기 표현을
내가 나의 오만을 표현하려는 방식으로
무마시키는 것만 같다.
그 과정에서
dominate 하려는 그 frame 은
나로 하여금 다른 곳에서 느껴야 했던
자아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듯
재빠르게 그들의 상상력을 깨뜨렸다.
그들의 말을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그리고 나의 불안함을 일시적으로
중화시켰다.
실제로
아이를 대하는 어른이라 불리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짓밟는 방식도
어쩌면 시차가 있는 자기 방어라는
자기 균형을 이루기 위한
자연 현상인지도 모른다.
실제 장면과
떨어져야
객관적으로 자신의 태도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나 또한
최대한 실제 상황에서
“제발”
비겁하지 않고
직선적인 방식으로
자기의 오만한 상상력에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타인의 상상력을 짓밟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이 깨달음의 과정도
아프고 화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지만
그러고는 내일 해가 뜨는 것처럼
내일 만화할 기회를 만나고야 만다.
그 또한 오늘의 쪽팔림을 무릅쓰고
뻔뻔하게 내일을 직면하는 영혼에게 주어지는
guilty pleasure 이라고 하면
난 이 순간의 깨달음을 위해
이별했던 당신과
잘 헤어진걸까.
때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의
사랑만 있으면
사실 특별한 깨달음은
외로움을 중화시키려는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누군가의 술안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그립고
그래도 괜찮고
그래도 보고싶고
그래도 살아지는 게
내가 내일 할 일일 뿐인 것만 같은
저녁이다.
Good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