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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Jun 02. 2024

"태어난 순간, 충분히 산 것이다“

살아있음이 곧 해답이다

나만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나만

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공식이

있었다




이별을 선고받는

것으로 이별은

완성되지

않았고




당신이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납득하기까지

소정의 시간이

걸렸다




그 소정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의

그것과는

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않았고,





당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웃을 수 있음을

다소 오랜 시간의

거듭을 걸쳐서 깨달았다.





'나의

당신'은

그렇게

세대에 걸쳐서

이름만 바뀌는 방식으로




나를 바라보는 방식은

그저

똑같이




그리고 헤어질 때

그 뒷모습의 완고함 또한

그 맥락을 같이 했다







만남의 공간은

그리움이

상쇄하는 방식으로




방금 나간 돈이

같은 방식으로

보상되지는 않았다







만남의 사건은

헤어짐이 상쇄하지 않았고




헤어짐 또한

항상 만남으로 치환되지

않았다






한 위대한 철학자는

우리는

태어난 순간

충분히

산 것이라 한다




그만큼 한 숨이

일평생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한번의 숨의 거둠이

일평생의

마감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내 곁의 사람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싶다만




피곤하고

정신없고

일관성이라고는

보장되지 않고



모두의 개인 사정으로

합리화 되는

약속의 무수한 불이행

끝에는

뭐가 있어야 하나 싶다





기쁨을 나눈다지만

주인공의 기쁨은

넘어서기

힘들었고




슬픔을 나눈다고 한들

홀로

견뎌야 하는

시공간에서

슬픔을 온전히 삼키는 건 본인이었다







거듭하는 시간이

보장하는 것은

피곤함이 보장하는

집과 일체가 되어가는 현상이었고,




여행이 선물한

타인의 흔적으로

그리움 속에

걸어들어가보지만

역시나

그에 상대하는 당신이

없음만 분명해지는

팩트가

아파 올 뿐이다.





시공간이 제한 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사람들이 비단

텔레비전 속 그들만이

아님을 알아간다.




이번 생,

지구라는 제한된 공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룰을 지키고,

사회인 코스프레를 해가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 미소 하나는

장착한 채

살아야 하는 시공간 또한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꽤 귀여울 것임을 인지는 하지만

막상 사는 현실에서는

나 또한 하나의 아바타 정도일 뿐인

듯.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한다.




미우나 고우나




일주일에 한 번

치킨 한 두마리

사서 집으로 돌아갈

마땅힌 이유가 되어준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한다.




무엇을 위한

노동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낮시간 동안의

업무 처리, 임무,

무수한 처리되지 않은 감정도




그 날의 막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집.

이 상징하는 어떤 것.




서로 미워하든, 싫어하든,



보살펴 줄 명분이

있다는 것이 산다는 것에 부여하는

중력과 관성의 무게는

 지구의 그것과 같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슬퍼할 필요도




대상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필요 이상의 무게 중심을

그 쪽으로 옮기지 않는 방식으로





홀로 잠들고

홀로 잠을 깨는

무수한 반복 속에서

기억해야 할 대상을 바꿔가며

그날의 음악과 함께

달력에 오늘도 무사히 살아있었음을

표시한다.







누군가 100억을 주면

받을거냐고 묻자

상대방은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내일 깨어나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 상대방은

받지 않겠다고 한다.




매일 주어지는 것 같아서

쉬워 보이는

삶이라고

잃을 가치와 호환되지 않았다.





산다는 건, 감히

조건을 달 수 없는

그저 귀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그대 어찌 나 없이 살 수 있는지

참 궁금한 방식으로,

나 또한 그대 없이 못 살 것이라는

선언을 무시하고

잘만 살고 있음을 목격한다.





산다는 건.




살아있는 김에

옆에 있게 된 사람과

웃을 만 한 일을 만들고

미워할 만 한 일을 만들지 않는

아슬아슬하게 지어가는

모래성인지도 모른다.







왜 '모래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





살아있음이 곧

 해답이라는 입장이다.





결국 어떻게든

답은 내 손으로

돌아왔다.




대답이 없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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