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터닝 포인트야”
#청민의플레이리스트
이영훈의 기다리는 마음 하나,와 함께 들어주세요. 불빛이 별처럼 쏟아지는 어느 밤하늘을 상상하며 읽어두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까닭 없는 외로운 잠이 문득 당신을 찾을 때, 꺼내 읽어주세요.
남산을 올라가는 노란 순환 버스 안에서 그는 말했다. 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전혀 상관없던 이야기들 사이에 등장한 터닝 포인트라는 단어는 나를 당황시켰으나 조금 행복하게 했다. 너는 나의 터닝 포인트야. 나는 그 말이 “너는 나의 첫사랑이야”라고 들려서 마음이 살짝 더워졌다.
“어... 나도.”
사실 그는 내게 큰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는데, 뭔가 그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고. 그는 나의 대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내가 왜 자신의 터닝 포인트인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자기 삶이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을 거고, 우리가 매일 오고 가는 등하굣길의 지하상가가 그렇게 자주 바뀌는지도 몰랐을 거고, 덕수궁 돌담길이 매일 그렇게 다른 빛을 띠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라고 했다. 평소에 좀 시니컬한 그였기에 그의 입에서 연달아 나오는 감성적인 장면들이 조금 낯간지러워 나는 목을 만졌다. 버스가 더워서 그런가 간질간질했다.
노란 버스가 남산의 언덕 아래에 섰다. 늦은 밤 우리는 야자를 째고 여기에 왔다. 여름밤의 향이 묻은 바람이 우리의 이마와 목을 쓸었다. 기분이 썩 좋았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도 썩 좋았다.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짜릿한 일탈을 즐기는데, 그는 야자를 빼먹은 건 열여덟 인생에 처음이라고 했다. 어딘가 불안한데 이 짜릿함은 참 기분 좋은 감정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또 나에게 배웠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그냥 좀 내려놓으라고 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챙기는 맏이 말고, 그냥 너로 살아도 괜찮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책임 질 수도 없는 말이었는데, 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언젠가 이렇게 뻥 뚫린 곳으로 꼭 여행 가자.”
그는 난간에 바짝 몸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나는 그냥 알겠다고만 했다. 우리 언젠가 어른이 되면 모든 책임을 떠나 꼭 이렇게 뻥 뚫린 곳으로 떠나자고.
그렇게 훌쩍 십일 년이 지났다. 열여덟이었던 우리는 교복을 벗고 스물아홉의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였으나, 보통의 우정들처럼 대학교와 직장을 다르게 가면서 연락은 조금 뜸해졌다. 그러다 그에게 연락이 왔다. 몽골에 가자고. 우리 몽골에 가자고. 몽골이라는 말이 주는 풍경에 나는 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나는 살면서 그 날의 남산을 자주 떠올렸다. 교복을 입은 그의 어깨와 땀으로 송골송골 맺힌 그의 이마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진심 어린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에게 그 날은 뭐랄까, 힘들 때 잠시 꺼내 먹는 기억이랄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고백으로 견디곤 했었다. 그런 그에게서 몽골이란 말을 듣는데 어딘가 설레면서도 불편했다. 스물 언저리에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가 영영 절교를 해버린 경험 때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경험은 마음을 굳게 만드는 것 같다. 망설임으로 몇 달이 지났다. 그는 또 나에게 몽골을 가자고 말했다.
“몽골은 꼭 너랑 가야만 해. 나는 몽골만은 꼭 너랑 가야 할 것 같아.”
그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나는 얼떨결에 몽골 티켓을 끊어 버렸다. 결국 나는 그와 올여름 몽골을 간다. 지난 시간 동안 조금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그와 나의 사이에 그 날의 남산처럼 다시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 가서 절교는 하고 오지 말자.”
“야, 나는 너랑 절교는 안 해.”
쓸데없는 걱정에 우리는 짧은 말을 주고받고 슬쩍 웃었다. 몽골. 하얀 사막에 파란 하늘. 저 멀리 넘어가는 해의 그림자들.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의 마음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우리는 몽골에서 어떤 기억을 안고 올까.
몽골 티켓을 끊고 나서 나는 십일 년 전 여름, 내가 너의 터닝 포인트라고 고백하던 그의 말에 나도,라고 말했던 내가 기특해졌다. 돌아보니 나에게도 그는 내 삶의 터닝 포인트였다. 내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말에 오래 기대었으니까. 그 말에 마음을 녹였으니까.
이런 우정도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운명처럼 상대를 변화시키는 어떤 우정이. 나는 또 그와 같은 우정을 만날 수 있을까. 운명처럼 서로의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가고, 상대의 작은 말 한마디에 사는 그런 우정을 나는 또 만날 수 있을까.
쏟아지는 별을 보는 몽골에서 그 날의 남산처럼 더운 몽골에서 나도 그에게 말해야지. 너는 나의 터닝 포인트라고. 네가 있어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고. 뒤늦은 진심으로 꼭 말해줘야지 생각하던 어느 밤이었다.
2019년 7월 27일 청민의 말:
그와 나는 정 반대의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 친구는 완벽한 이과, 저는 완벽한 문과.
어느 하나 맞는 게 하나도 없는 저희가
오래도록 친구일 수 있는 이유는
그와 나 모두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 그 친구와 함께 몽골에 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아주 기분 좋게 붑니다.
높은 언덕의 난간에 기대어 풍경에 기대고 싶지만,
난간엔 기대면 안된다는 어느 말에
멀리 떨어져 풍경을 구경해 봅니다 :)
우리는 몽골의 초원을 보며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깊고 깊은 대화 끝에 아마 긴 침묵이 이어지겠지요.
긴 침묵이지만 그 친구와 함께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