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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14. 2020

월급이 주는 가장 큰 행복은

#14.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만 봐도 기쁘다는 말을 알게된 어느 밤

* 해당 글의 시간 배경은 마스크로부터 자유로웠던, 2019년입니다.



입사를 앞두고 뜬금없이 친구가 스티커 하나를 주었다. 자기가 아끼는 거라며. 스티커엔 '월급날이 다가온다!(정확한 문구가 생각나진 않지만)'는 인상적인 문구가 쓰여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5년 간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 친구는 '이제 너도 월급날만 기다리는, 나와 같은 동지가 되었구나' 하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오래 친구의 진정한 동지가 되지 못했다. 이상하게 '월급날이 다가온다!'라는 문구에 마음이 뛰지 않았달까. 입사 전에도 알바로 돈을 계속 벌어왔기 때문일까. 직장인의 월급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보다 더 많고, 알바 때처럼 떼일 걱정이 없다는 안정감을 주는 걸 제외하곤 큰 차이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들어오면 들어왔구나 하는,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은 때라 큰 감회가 없는 존재였달까. 월급에 대한 감정을 다 알지 못했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재 날짜에 밀리지 않고 내 통장에 인사하듯 들어왔다. 돈이 들어오는 월급날이면 나는 바로 월세와 관리비, 생활비 그리고 적금을 나누곤 했다.


그즈음, 동생 찬이 일산으로 놀러 왔다. 영국으로 단기 연수를 가기 2주 전이었다. 일산에서 서울은 지하철로 1시간 정도 거리니까, 서울 구경을 하겠다고 우리 집에 며칠을 묵었다. 혼자 살던 습관이 붙어 작은 공간에 찬과 북적북적 붙어 있기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어렸을 때처럼 마주 보고 매 끼니를 함께 먹고 퇴근 후에 동네 한 바퀴를 걸을 수 있어 좀 재밌었다. 찬이 우리 집에 머무는 날 중, 하루가 마포에서 글쓰기 수업을 듣는 날이라 찬과 함께 서울을 나섰다. 내가 글쓰기 수업을 듣는 동안, 찬은 소위 핫하다는 홍대와 연남동 망원동 일대를 구경하러 다니기로 했다. 수업을 마침과 동시에 우리는 합정역 부근의 스타벅스 앞에서 만나, 조금 더 산책을 하다가 집에 가기로 했다.


마침 그 날은 나의 월급날.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한 값이 통장으로 고개를 쏙 내민 날이었다. 찬은 대학생에다, 영국 단기 연수를 준비한다고 알음알음 모은 전재산을 모조리 턴 상태라 수중에 돈이 없었지만, 내 주머니가 오늘 막 채워졌으니 남매의 놀이 코인은 준비가 되었다. 어렸을 때 서울에서 살았던 우리는 오랜만에 서울 구경을 해보기로 했다. 추억을 곱씹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것도 서울에서 젊은이들이 모인다는 핫플, 연남동을!



우리는 가장 먼저 망원동 티라미수에 가서 티라미수 하나를 사 먹었다. 학생 때는 사 먹기 망설여졌던 디저트였지만, 오늘의 내겐 채워진 코인이 있어 용기 있게 하나를 바로 구입했다. 가게 앞에서 찬과 한 입씩 떠먹으며 '오, 엄청 맛이 풍부하다'하는 호들갑을 떨며, 인스타에서 많이 본 사진처럼 가게 입구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티라미수를 시작으로 우리는 오늘 '먹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비싸서, 서울에만 팔아서) 먹지 못했던 간식들'을 잔뜩 사 먹어 보기로 했다. 그땐 탕후루가 유행했을 때라, 유튜브에 들어가면 먹방 유튜버들이 자주 먹던 간식도 거리에서 사 먹었다. 딸기에 설탕 시럽이 잔뜩 올라간 딸기 탕후루. 유튜버들의 asmr 영상처럼 정말 깨물자 말자 기분 좋은 와그작와그작 소리가 났다. 찬과 나는 와그작 와그작 딸기 탕후루를 먹으며 신이 나서는 연남동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밤 11시가 되었고, 우리는 막차를 타러 슬슬 버스 정류소로 걸어가야만 했다. 집에 갈까 말까 거리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찬이 '누나, 여기 근처에 리버풀 펍 봉황당이란 곳이 있는 데 거기 잠깐 갔다가 가면 너무 늦을까? 예전에 친구랑 잠깐 갔었는데, 거기 모이는 분들이 리버풀에 대해 너무 잘 아셔서 대화가 너무 즐거웠거든.' 하는 게 아닌가. 찬은 리버풀의 오래된 팬으로 내 눈에는 비슷해 보이는 유니폼을 주기적으로 구입하고 입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는데, 찬의 리버풀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거기서 바로 '안돼'라고 할 수 없었다. 지금 시간은 밤 11시이고, 찬이 말하는 곳에 들렸다가 잠시 앉았다가 일산까지 넘어가려면 넉넉잡아 2-30분밖에 있지 못하니, 택시를 타야 했다. 홀로 짧은 고민을 마치고 찬에게 '콜!'을 외쳤다.


봉황당은 연남동 메인 거리 바로 뒤쪽에 있었다. 가게로 내려가는 계단에, 'This is Anfield'란 큰 문구가 있었다. 찬은 그 문구를 보면서 자기 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했다. 그리곤 포즈를 잡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리버풀 tmi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누나, 안필드 몰라? 안필드! 리버풀 전용 구장! 그리곤 한 손을 턱 올리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는데,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찍는 거라고 해서 일단 최선을 다해 찍어 주었다. 가게 안에는 리버풀과 관련된 기념품, 선수들의 포스터, 리버풀 기사가 담긴 신문들이 잔뜩 있었다. 안쪽에는 바 형태의 테이블이 있었고, 입구 쪽에는 테이블들과 벽 쪽에는 축구 영상이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찬은 사장님께 혹시 자기 기억하냐며 자연스레 바형 테이블에 앉았고, 축구에 축도 모르는 나는 찬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축구 영상을 보았다. 찬은 내가 이 상황을 어색해 할까봐 계속 챙기려고 했지만,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흘러나오는 축구 영상을 계속 보았다. 중간중간 찬을 흘끔흘끔 보았는데, 찬은 아주 신나서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 축구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축구 얘기할 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빠도 축구를 좋아해 두 사람이 자주 얘기는 했지만, 또래와 나누는 축구 얘기는 찬을 더 들뜨게 하는 듯했다.


시간은 벌써 11:30분. 버스를 타야만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찬은 내 눈치를 보았다. 우리는 그 가게에 들어간 지 겨우 20분이 지난 상태였고, 나는 걱정하지 말고 있고 싶은 만큼 있으라고 했다. 정말 괜찮다고, 누나 이제 돈 버는 직장인이라는 생색과 함께. 하지만 찬은 내가 내내 신경이 쓰였는지 겨우 1시 조금 넘어 집에 가자고 했고, 나는 새벽에 하는 축구 경기까지 보고 가자고 했지만 찬은 이것만으로 충분하자며 내 팔을 당겼다. 결국 우리는 합의 하에, 1시간 정도 함께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연남동을 다녔던, 2019년 사진.


일산으로 가는 택시 속 자유로. 찬은 자꾸만 올라가는 택시비에 자꾸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보았다. 내가 저 마음 딱 알지. 내가 취준생 때 딱 저랬지. 그런데 동생은 나와는 달리 절약정신이 남다른 애였다.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딱 참는 애였다. 그런 애가 새벽에 무려 장거리 택시를 타다니. 홍대 입구에서부터 일산까지 야간 택시비는 28,000원 정도가 나왔다. 나는 자연스레 카드로 결제를 했고, 택시에 내린 다음 찬의 첫 마디는 '누나, 내가 되게 미안하다'였다. 참으면 되는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누나 돈을 쓰게 했다는 동생의 마음이었지만, 나는 '야, 누나 돈 많이 벌어. 이런 거 미안하다고 하는 거 아냐. 그냥 네가 즐겁게 있었으면 됐고, 다음에 누나 아이스크림이나 사줘'라 했다. 그러자 찬은 누나 어른 다 되었다며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웃었다.


그 날 알았다. 월급이 주는 행복을. 직장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택시 비 28,000원으로 찬이 그토록 좋아하는 시간을 선물할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했다. 좋아하는 것에 둘러 쌓여, 좋아하는 대화를 하는 찬.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표현하는 찬. 어쩌면 그 날 나는 그토록 오래 함께 살아왔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찬의 기쁨을 살폈다. 찬은 좋아하는 걸 볼 때 저렇게 웃는구나,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멀리서 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만 봐도 기쁘다는 말을, 처음으로, 정말 난생처음으로 공감한 날이기도 했다.


첫 출근을 앞두고 친구가 준 스티커의 문구는 이런 의미였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월급날이 다가온다!'는 설렘은, 나를 위한 설렘이기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설렘. 버스값도 아까워서 걸어 다니고 도시락을 싸 다니던 내가, 비싼 디저트를 턱턱 사 먹고, 새벽에 장거리 택시비 28,000원을 그냥 턱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니. 오직 나 홀로 버틴 하루의 값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은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니. 기분이 이상한데, 되게 좋았다.


자기 전 침대 아래에 누운 동생이 말했다. 누나, 고마워. 내가 나중에 돈 벌면 맛있는 거 사줄게.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나 소고기 사줘. 소고기란 말이 우스웠는지, 우리 둘은 어렸을 때처럼 웃음을 풋 터트렸다. 이불을 덮고 눈을 꼬옥 감고, 매일이 힘든 신입사원은 생각했다. 나는 너를 위해 조금 더 힘들어도 되겠구나. 찬의 기쁨으로 충분한 하루였다.



* 100 매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해당 원고는 초고입니다:)



청민 Chung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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