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어른이 되며 나는 무엇을 잃고 또 무엇을 얻었을까.
며칠 전부터 허리가 아프다. 누가 척추의 위와 아래를 꾹 눌러 압박하는 것 같다. 압력으로 척추가 휠 것 같기도, 틀어질 것 같기도 했다. 선배들은 이게 다 코어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던데. 잔잔하게 이어지는 찌릿한 고통에 제대로 앉아있기 아픈 지경까지 왔다.
기억하기로 고통은 지난 화요일부터 시작됐다. 우선 지난주와 이번 주 연달아 담당 도서가 배본되기도 했고, 새롭게 시작하게 된 콘텐츠 업무가 생기며 일의 양이 전보다 확 늘어났다. 게다가 수요일엔 하반기 목표 수립 관련 회의까지 있었다. 어제는 연차를 쓰는 바람에 업무에 대한 부담이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무거웠다. 우선 이런 날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필요한 건 집중력과 끈기. 가장 먼저 오늘 해야 하는 일의 리스트를 세우고, 중요도에 따라 차곡차곡 일정을 진행한다. 나름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한 구석엔 내일 있을 회의 때문에 불안함이 살살 끓었다. 일어서서 발표하는 부담스러운 pt자리도 아닌데, 주목하는 말하기를 힘들어하는 내게 한 사람씩 말해야 하는 회의는 언제나 쥐약이다.
초집중을 했음에도 일은 끝날 생각이 없었고, 결국 두 시간이나 초과근무를 했다. 허리가 아팠다. 긴 시간 움직이질 않아 굳은 듯했다. 평소 이럴 땐 손을 머리 뒤로 젖히거나 손으로 허리를 두드려 주면 좀 나아졌는데, 오늘의 통증은 좀 남달랐다. 대충 저녁을 챙겨 먹고, 다시 책상에 앉아 혼자 진행하고 있는 개인 프로젝트인 100일 매일 쓰기 원고를 썼더니, 세상에 밤 11시. 이게 뭔가 싶지만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내일 회의를 위해 책상에 앉았고, 미리 제출했던 하반기 목표 자료를 꺼냈다. 솔직히 그냥 자도 되는데, 부사장님께서 들어오시는 회의라 괜히 불안했고,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책상 앞에 앉아 자료를 반복해서 읽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잠까지 설친 후 출근을 했고, 언제나 그랬듯 회의는 나의 불안함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원활하게 끝났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까지도 일이 많았다. 카피는 수정에 수정을 거쳐, 최종본, 진짜 최종본, 이게 레알 최종본, 아니 이게 리얼 리얼 최종본 222의 이름을 거쳤다. 화요일에 잠을 못 잤더니, 수요일도 목요일 밤도 잠을 설쳤다. 결국 금요일엔 아침에 눈 뜨는 게 세상에 이런 괴로움이 없을 정도였다. 허리가 아팠다. 평소와 같은 잔챙이 같은 통증이 아니었다. 다리도 꼬지 않고 허리도 굽히지 않고 최대한 바른 자세로 앉았는데도, 허리에 가해지는 압력에 자꾸 몸을 비틀었다. 그제야 드는 생각. 아, 진짜 운동을 해야겠구나.
살려고 운동을 한다던 직장인 선배들의 말은 엄살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내가 그들보다 어리고 체력이 좋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모든 건 의지의 문제라는 오만한 마음을 갖고 있던 때. 그 시절엔 원고를 쓴다고 며칠 밤낮을 바꿔 생활해도 몇 시간만 자고 나면 쌩쌩해졌고, 온종일 꼼짝 앉고 책상에 앉아 있어도 허리는 튼튼했다. 마음껏 다리를 꼬고, 거북목이 되어도 통증 하나 없던 시절. 어느 때보다 중심에 오직 나로 가득 채워졌던 시절. 마음의 체력은 약했지만 몸의 회복은 빨라서, 오만하고 건강해서 세상이 내 것만 같던 시절.
20대의 나는 뭐든 마음만 먹으면 이뤄질 거라 생각했고, 대부분은 정말 마음처럼 움직였다. 간절히 원해도 잘 찾아오지 않는 지금과는 다르게, 기회와 선택지가 많았다. 의지 하나로 꾸릴 수 있는 미래가 있었다. 어린 마음이 다치는 날들이 있었지만, 결국 의지로 원하는 순간을 얻는 안전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는 순간부터 변화가 찾아왔다. 의지 하나로 내일을 꿈꾸기엔 세상은 거대했고 영리했으며 단단했다. 하라고 하면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 생겼고, 먹고살기 위해 몸을 움츠리는 순간들이 생겼다. 말이 많았던 나였는데, 그렇게 삶에서 조용히 견뎌야 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깊은 허리의 찌릿함을 느끼며, 자연스레 필라테스나 요가 같은 코어에 좋은 운동을 시작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전에 해보지 않은 고민을 시작하는 낯선 오늘을 마주하며, 어쩌면 나이란 뒤에서 몰래 다가와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낚아채는 도둑고양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른이 되며 나는 무엇을 잃고 또 무엇을 얻었을까. 어느 순간 후다닥 변해버린 하루를 살피며, 지난날 흘려보낸 기억들을 꺼내본다. 운동은 살려고 하는 거라던 선배, 휴일만 되면 온 몸이 아프다던 아빠, 주말 밤은 쉬어야 해 일찍 헤어지자던 친구까지. 뭇 얼굴들이 떠오른다. 오늘 내가 겪는 변화를 먼저 겪었을 그들의 얼굴을.
절정으로 치닫는 통증에, 조금 서글퍼진다. 침대에 바로 누워 쉬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다시는 이렇게 무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몸의 회복이 빠르던 시절엔 알지 못했던, 감당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침대에 누워 찾는다. 코어 운동을 해야지, 중심이 무너지면 끝이니까 하며. 마음이던 체력이던, 나를 조금 덜 잃는 쪽으로 살아야지 하며 마음을 틀어 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날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하는 흔한 생각도 해본다. 몸의 회복이 빠르던 시절엔 알지 못했던, 마음과 몸을 아끼는 노하우를 하나 둘 차곡차곡 쌓는다. 그렇게 오늘의 안전한 나만의 평균값을 찾아낸다.
내일은 평일에 못 잤던 잠을 몰아 자야지. 꼭 늦잠을 자야지. 오래 책상에 앉아있지 말고,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하며 걸어야지. 다리는 꼬지 말아야지.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힘들었던 만큼 평온을 찾기 위한 쪽으로 다짐의 추를 얹어 본다.
정말이지 그래도 건강은 했으면 좋겠다.
* 100일 매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해당 원고는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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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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