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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Nov 21. 2021

호숫가에 앉아 먹던
나의 여름 도시락

퇴근 후 자전거│ written by 브롬톤 라이더, 루비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갈증에 허겁지겁 자두를 꺼내 물었다. 달콤한 과육 끝에 시큼한 껍질이 씹힌다. 잘근잘근 씹힐수록 피어오르는 신맛. 평소엔 즐기지 않지만, 여름의 신맛은 이상하게 좋다.


여름의 맛이 다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도시락을 챙긴다. 노을이 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준비하기 쉬운 음식을 뚝딱 만들어서 자전거를 이끌고 나선다.


확실히 자전거를 타면 기분이 나아진다. 무겁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호수 한 바퀴만큼은 가벼워진 달까. 달리는 만큼 가벼워지는 게, 꼭 자전거 길에 마음을 조금씩 떼서 흩뿌리는 기분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부스러기처럼 작은 근심을 똑똑 떨어뜨린다.


종착점은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내가 좋아하는 호수의 왼쪽 끝. 이 자리에 있으면 저 멀리 지나가는 비행기도 호수도 노을도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함께 보인다. 땀을 잔뜩 흘리고 계단에 앉아 꺼내는 것은, 도시락. 평소에도 좋아하지만, 여름만 되면 자꾸자꾸 꺼내먹는 나만의 여름 도시락이다.




여름은 샌드위치의 계절!


주변에서 샌드위치 만들기 너무 귀찮지 않으냐고 묻지만, 내가 누구냐. (구) 파리바게트 샌드위치 메이커로, 아침 7시부터 샌드위치를 70개까지 만들어 본 사람이다 이 말씀이야. 내 손으로 삶은 계란이 몇 알이고, 손질한 양배추가 몇 통인지!


아무튼 나름의 경력자에게 샌드위치는 냉장고 털이 비빔밥만큼 쉬운 것. 얼려 놓은 식빵을 살짝 굽고 있는 재료들을 잘 쌓아준다.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사과 계란 샌드위치. 삶은 계란에 마요네즈를 넣고 대충 섞은 다음, 사과를 얇게 썰어 겹겹이 쌓아준다. 사각사각 씹히는 맛에 괜히 사뿐사뿐 살랑 거리며 걷고 싶어진 달까.


* 계란마요+사과 조합은 꿀맛.

* 블루베리 잼+계란과 양배추 채 썰어 함께 부친 것+치즈+햄 조합도 끝내준다.





일단 넣고 화르르 볶아버려, 볶음밥


죽, 샐러드, 볶음밥을 좋아한다. 일단 있는 재료를 다 넣고 화르르 볶아버리면 그럴싸한 요리가 짠- 나타나니까. 볶음밥 중에서도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김치볶음밥. 가위로 김치를 대충 숭덩숭덩 잘라 참기름에 볶다가, 어묵과 양파도 잘게 잘라 함께 수분이 날아갈 때까지 볶는다. 김볶은 역시 물기 없이 바짝 날려야 제맛. 냉장고에 작은 새송이버섯도 남아 센 불에 빠르게 볶았다.


요리의 마지막은 언제나 체다치즈 한 장. 음식의 마무리는 치즈다. 이상할 것 같은데 어디든 되게 잘 어울리고, 또 망친 요리도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어주니까.


* 있어 보이는 볶음밥을 위해선, 체다치즈와 크러쉬드 레드페퍼, 통후추 구비는 필수다. 맛없어도 있어 보이는 마법이 일어날지어다.






만사가 귀찮을 땐, 그릭 요거트 볼


만사가 다 귀찮을 때가 있다. 아무리 해 먹는 걸 좋아하더라도, 방전된 배터리처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런 날엔 작은 유리 볼에 요거트를 챙긴다.


지난밤 고운 면보로 유청을 빼둔 꾸덕꾸덕한 요거트에 냉장고에 남은 과일들을 싹싹 넣는다. 여름에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요거트에 블루베리와 자두를 넣은 조합. 거기에 꿀 한 스푼까지 더하면 산뜻한 단맛과 신맛이 에너지를 채워준다. 저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며 떠먹는 요거트 볼.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블루베리에 톡톡 에너지가 충전된다.


* 견과류를 잘게 부수어 넣어 먹어도 꿀맛. 오독오독 식감이 좋다.




김밥과 떡볶이가 있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지


단골 분식집이 생겼다. 갈 때마다 포장 용기를 꼭 챙겨 가는데, 어찌나 꼼꼼하게 싸주시는지. 한 번은 거금을 주고 산 렌즈를 잃어버렸는데, 떡볶이집에 있던 게 아닌가. 보관해주신 게 고마워 과일 주스를 몇 개 사서 갔는데, 사장님께서 그다음부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먼저 해주신다. 이러니 떡볶이를 더 사랑할 수밖에.


떡볶이는 어느 계절에 먹어도 맛있지만, 여름밤 땀 뻘뻘 흘리며 김밥에 국물을 푹 찍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다회용기에 포장한 떡볶이 튀김 범벅과 김밥의 맛이란. 세상 모든 스트레스여, 저리 가라! 떡볶이가 있는 세상은 그럼에도 살만하다.


* 항상 떡볶이 사진은 없다. 뚜껑을 열자마자 사진 찍을 틈도 없이 먹어버려서 그런가 보다. 떡볶이는 위험해.





길어지고 심해지는 코시국에 여행도 그립고 사람들도 그립지만, 나는 호숫가에서 먹던 도시락이 가장 그립다. 퇴근 후 자전거를 타고 송골송골 땀 흘리며 먹던 도시락. 달달하고 시큼하지만 그래서 기분 좋던 나만의 여름.


밀려오는 호수 물결을 바라보며 먹던 나만의 여름을 빼앗긴 기분이 들어 살짝 슬퍼지지만, 여름은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돌아올 테니. 조금 늦더라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왔으면 좋겠다. 그러니 다시 볼 때까지, 모두 건강한 여름이기를. 다정한 여름이기를 바라본다.






퇴근 후 자전거

직장인 셀린과 루비의 사이드 프로젝트. 두 직장인이 퇴근 후 자전거를 타며 발견한 장면을 번갈아 가며 기록합니다.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이메일로 총 12회 연재합니다.(21.6.10 - 8.26)


퇴근 후 자전거 발행인

따릉이로 한강을 달리는 셀린 @bluebyj

브롬톤 라이더 루비(청민 부캐) @w.chung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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