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여지지 않는 책

by 낭만피셔

그분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아주 두꺼운 책과 같은 사람이었다. 펼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페이지마다 활자로 박힌 삶의 흔적들은 경이로웠다. 아주 어린 시절의 동네 골목을 누비던 작은 발자국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풋풋한 시절, 그리고 스무 살의 낭만과 혼돈이 뒤섞였던 대학 생활. 서툴렀던 첫 아르바이트와 고단했던 직장 생활의 애환까지. 그분의 삶이라는 책 페이지는 끝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절반은 내게도 익숙한 얼굴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영원히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책 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만났다. 중학교 동창, 대학교 동아리 선후배, 교수님, 직장 생활의 무게를 함께 견뎠던 옛 직장 동료들까지.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그곳에 서 있었다. 나만 아는 유명인을 한자리에 모여 만나는 것 같은 신기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곳은 기나긴 이야기의 종착점이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슬픈 커튼콜. 무대 위 조명이 꺼지고 영원한 암전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올려진 막이었다.


그분이 떠나고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이 책의 다음 페이지가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아무도 이 책에 새로운 글을 추가할 수 없다. 어쩌면 지금쯤 그분은 더 많은 이야기를 쌓았을 텐데. 나의 시선 속에서 혹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우리 아이의 작은 미소를 통해서. 한동안 놓고 있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여 새로운 악보를 모아갔을 수도 있고 우연히 만난 옛 친구와 우정을 다시 싹틔워 새로운 관계의 장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모든 '만약'의 이야기들은 시작도 못한 채 흩어져 버렸다.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은 영원히 백지로 남을 것이다.


이제 그분의 이야기는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며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닳아간다. 기억은 휘발성이 강한 잉크처럼 선명했던 순간들마저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내가 좀 더 똑똑했다면 기억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더 많은 것을 붙잡아둘 수 있었을 텐데. 압구정의 한스케익을 지날 때마다 여기가 그분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이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아기에게 말해줄 수 있을 텐데. 내 세상의 모든 장소에는 그분의 이야기가 흔적처럼 묻어있다. 걷는 길마다 마주하는 풍경마다 그분의 숨결이 느껴진다. 어딜 가도 그분의 목소리가 떠오르는데 그 이야기가 이제 영원히 멈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시계가 한순간에 멈춰버린 듯한 정지된 시간 속을 걷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내가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제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나 혼자만의 희미한 독백이 되어 사라질까봐 그것이 가장 두렵고 가슴이 아프다. 거대한 박물관에 나 혼자 남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물들을 홀로 지키는 고독. 이 소중한 기억들이 나의 내면에서조차 빛을 잃고 마침내 영원히 어둠 속으로 잠식될까 두렵다. 그분의 이야기가 나라는 존재 안에서조차 사라져버리는 순간, 나는 진정으로 혼자가 될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두려움 속에서 나는 오늘도 끝나지 않는 책의 빈 페이지를 응시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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