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랑 비슷한 것 같아요"
추석 연휴를 앞두고 병원을 방문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의사 선생님은 어딘가 로봇 같은 느낌이다. AI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이야기는 잘 들어주고 공감도 잘해주시지만 어딘가 감정의 교류는 전혀 없는 건조하고 효율적인 대화 방식. 사실 나도 적극적인 공감과 위로보다는 그저 이야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의사: 요즘은 어떠세요?
나: 평소랑 비슷한데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의사: 최근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크게 웃은 적이 있으셨어요?
나: 없는 거 같은데요
의사: 텐션이 크게 오르지 않는 것도 우울증 증상의 하나라서요
나: 그런데 요즘에 기분 좋을 일 자체가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의사: 약은 어떠세요? 좀 늘릴까요?
나: 오, 아뇨. 괜찮은 것 같은데요?
의사: 지금 약 처방이 약해서… 괜찮다고 하시니까 한 달 정도만 똑같이 처방하겠습니다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부터 '우울증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체감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검사와 테스트를 진행하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으면서 분명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좋아지는 것 같은데', '약은 한 달만 먹어도 되겠다' 싶었다. 이번에 처방받은 약만 먹고 병원은 그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상태가 ‘괜찮음’의 영역으로 회복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넘는 연휴가 훌쩍 지나갔다.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도 가고, 박물관도 가보고, 혼자 영화도 봤다.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이었다. 연휴의 마지막 날, 잠들기 전 약을 먹으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번 연휴 때 난 어떤 기분이었나?' 곰곰이 생각했다. 딱히 기쁨이나 즐거움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냥 '평소와 비슷했다.'
그때 한 가지 질문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에게 평소 기분이라는 건 대체 뭘까?"
그 순간, 나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내가 '평소 기분'이라고 여겼던 감정의 기본값이 사실 우울함이었다는 것을. 멍하니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이 이제 나의 기본 세팅값이 된 것이다. 좋아진 것이 아니라 나의 우울함을 내 머리가 적응해 버린 것이었다. 그동안 낮은 수면 아래에 머물러 있는 마음을 평온함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삶이 더 힘들어졌다. 몰랐으면 괜찮았을 텐데. 무심코 마음의 상처를 들춰봤다가 그곳이 더 아파졌다. 새로 알게 된 진실은 일상에 독이 되었다. 회사 일에 누군가의 무심한 말에 스트레스가 심해졌고 삶에 대한 회의감도 좀 더 심해졌다. 나의 '평소'가 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제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겠지. 약을 늘려야 할 것 같다. 이번에 병원에 가서 약을 좀 더 세게 처방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의사 선생님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괜찮은 줄 알고 살아왔는데. 이제 나는 이 치명적인 '평소 기분'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을 좀 다시 써야겠다. 하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해봐야겠다. 글을 쓰고 싶고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냥 해봐야겠다. 소설을 쓰든, 시나리오를 쓰든, 무언가에 정신을 좀 놓아버리자. '평소 같은 기분', '평소 같은 하루'가 내게 독이니까. 평소에 하지 않던 일, 하지 않았던 일들을 좀 더 해봐야겠다. 매일매일 귀찮게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써보도록 하자. 나의 '평소 기분'이 독이니까. 다음 주는 '낯선 기분'으로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