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여행이라도 출근보다는 낫지
직장인의 연차는 질소 과자 같다. 뜯기 전까지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지만, 막상 뜯고 나면 내용물은 얼마 없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오랜만에 3일 연차를 내고 떠난 여행도 그랬다. 공항 면세점 아이쇼핑이 도파민의 최고점이었다. 낯선 도시에 떨어지는 순간 설렘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의무적으로 몇 군데의 명소를 돌고, 맛집을 찾아 배를 채웠다.
'아무리 시시한 여행이라도 출근보다는 무조건 낫지'
2호선의 지옥철 속에 몸을 구겨 넣으며 생각했다. 몸보다 정신이 먼저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서 출근을 해야 할까. 향수 향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불쾌한 공기가 코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닷새 만에 들어선 사무실은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권태로운 적막이 아닌, 어딘가 어수선한 느낌의 고요함. 나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며 옆자리에서 마우스만 만지작거리는 후배에게 물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화들짝 놀란 후배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말 대신 메신저 창을 띄웠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후배 : 금요일에 부장님 쓰러지셔서 119 실려 갔어요
나 : 헐 정말요? 왜요?
후배 : 그건 저도 잘... 입원하셨다고 하던데
나는 고개를 돌려 파티션 너머 부장의 자리를 훔쳐보았다. 덩그러니 비어 있는 검은색 의자. 주인 잃은 책상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허전해 보였다. 야근을 그렇게 하더니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 : 큰일 날 뻔했네요
입에 발린 걱정을 건넸다. 그런데 후배의 답장이 늦었다. 입력 중임을 알리는 '...' 표시가 떴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나에게도 무슨 일이 생겼나?
후배 : 그런데... 박 대리님이 부장님 지갑 찾는다고 서랍 뒤지다가요
후배 : 선배님 사진이 몇 장 나왔어요...
나 : 네?
"이게 뭔 소리예요?"
나도 모르게 육성이 터져 나왔다. 사무실의 어수선한 적막에 날카롭게 금이 갔다. 후배는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나는 당황스러움보다 더 큰 황당함에 목소리를 낮추지 못했다.
"미쳤나?"
주변이 시선이 꽂히기 시작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 인간 서랍에 왜 내 사진이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박 대리를 찾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진짜예요?"
"아... 네..."
"아니.... 대체 그게..."
"근데 지금 민수 씨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진짜로"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통을 받아왔는데..."
"그때 같이 있던 몇 명만 봤어요, 저희도 다 모른 척할 테니까... 그냥 그려려니 하세요"
"하..."
제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던 사람. 왜 그 사람의 서랍 속에 내가 있었을까. 날 좋아했나? 아니면 집착이었나? 그렇게 나를 괴롭힌 게 애정의 표시였던 걸까? 아니면 혹시 너무 싫어서 사진을 보며 저주를 하려 했을까. 어느 쪽이든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텅 빈 부장의 의자가 기괴해 보였다. 저 자리에서 날 몰래 바라봤겠지. 몰래 사진도 찍으면서. 어쩐지 여행이 지독하게 재미없더라니. 인생의 빅 이벤트는 낯선 여행지가 아닌, 내가 부재했던 지루하고 익숙한 사무실 책상 아래 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