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일
몇일 전이 기일이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기념할 날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기억하지 싶지 않은 날이었으니까. 하필이면 설연휴와 겹쳤다. 미리 납골당의 사진을 바꿔 두고, 아침 일찍 아이와 다녀왔다. 날씨가 1년 전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날과 비슷한 온도, 비슷한 냄새, 습도.
사실, 나는 그날로부터 365일만큼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였다. 어쩐지 요즘 자꾸 생각이 나더라니. 우리 인생은 폐곡선일까. 결국 같은 지점을 다른 얼굴로 마주하는 걸까.
어쨌든 다시 365일. 진짜 2026년이 시작됐다.
2. 슬립노모어 (SLEEP NO MORE)
이머시브 공연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정확하게 뭔지는 몰랐다.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 하고 핸드폰도 볼 수 없다. 그리고 하얀색 가면을 쓰고 입장한다. 알고 간 정보는 단 두 가지였다. 맥베스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 관객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즐긴다는 것. 마임축제 같은 걸 상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오픈월드 RPG에 가깝다. '매키탄 호텔'이라는 거대한 공간 안에서 맥베스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관객은 유령이 되어 그들을 지켜본다. 공연은 총 세 번의 루프로 반복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렸을 때, 나는 혼자였다. 아무런 설명도 안내도 없었다. 그게 공연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루프. 매키탄 호텔은 6~7층 규모. 계단으로만 이동해야 한다. 공간은 어둡고 음악은 으스스하다. 방 하나하나가 비현실적으로 정교하다. 병원, 묘지, 상점가 등등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이다. 정말 하나의 세계였다. 어리둥절한 채 돌아다니다 보니,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배우를 따라가는 무리였다. 몇 명의 배우들이 더 보였다. 누구를 따라갈까. 배우들은 혼자 있기도 하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한다. 가면을 쓴 관객들이 점점 많아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쓸려 다니다 보니 어느새 "HELLO THERE"라는 간판의 공연장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EDM 파티. 압도적이었다. 여기서 돈 값의 반은 했다. 그리고 연회장.
두 번째 루프. 나는 한 사람을 따라다니기로 결정했다. 내가 고른 인물은 마녀였다. 맥베스나 레이디 멕베스 주변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녀를 따라다니다 보니 이야기가 조금씩 연결됐다. 알고 보니 EDM 파티는 마녀들의 것이었다. 첫 번째는 아래에서 봤고, 두 번째는 단상 위에서 봤다. 시점이 바뀌니 완전히 다른 장면이었다. 문득 배우가 아닌 관객들을 쳐다봤는데 묘했다. 같은 가면을 쓰고 같은 방향을 응시하는 모습. 누군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사람들. 관객들도 이 공연의 한 부분이구나. 배우들을 따라다니며 스토리를 쫓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다른 방식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연회장.
세 번째 루프.
난 배우들을 쫓지 않기로 했다. 그냥 공간을 걸었다. 욕조 안에 있는 레이디 멕베스를 보기도 하고, 바텐더 아저씨를 구경하기도 했다. 오픈월드 RPG처럼. 퀘스트를 무시하고 맵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배우들은 NPC였다. 마주치면 좋고 못 만나도 상관없었다. 내가 매키탄 호텔에 사는 유령. EDM 파티를 하는 동안 뒤에 술집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구나. 여기는 간호사가 있었구나. 배우들은 무대 위 존재가 아니라 이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회장. 세 번의 반복 끝에 이곳에서 이야기가 닫힌다.
가격이 세서 걱정이 많았는데, 결과적으로 돈 값 한다. 무엇보다 공간이 대단히 훌륭하다. 방 하나하나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몇 번씩 보는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보고 싶다. 다만 개인적으로 배우를 쫓기보다는, 홀로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방식이 더 좋았다. 그리고 큰 이벤트 장면에서 가면을 쓴 관객들을 한 번씩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것도 공연의 일부다.
슬립노모어는 멕베스의 이야기다. 보기 전 미리 알고 가면 좋고, 매키탄 호텔에서는 스토리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그 세계를 충분히 체험하는 편이 좋다. 이 공연의 핵심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이니까.
아 그리고, EDM 파티는 꼭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