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첫사랑과 때묻은 현실의 2012년식 해후
건축학 개론 (Architecture 101,2012)건축학 개론 (Architecture 101,2012)
※ 스포일러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편적인 첫사랑의 기억이 현실과 조우하다.
이건 강력한 공감과 치유의 영화다.
대개 연애의 주도권이 여성에게 있었던 풋풋한 스무살, 새내기 시절의 첫사랑, 대부분은 짝사랑.
처음 누군가에게 마음을 순식간에 뺏겨 버린 나 자신이 경이롭고 유치하리만큼 순수했던 감정에 도취되어 혼자 대단한 사랑을 하는 사람인마냥 설레였지만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전개와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설레임과 부끄러움의 정수. '첫 사랑'.
신기하게도 그 시절에는 늘 나보다 잘 나고 다방면에서 절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대단한 선배'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이성의 마음을 열고 닫을 수 있을 것 같은 '연애박사 친구'가 있었다. 짝사랑에 지쳐 서러운 마음을 술과 담배의 환각을 빌려 친구에게 실토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고 그마저 위로받을 땐 뿌듯했던 그 시절의 순수함 그리고 항상 함께 다닌 소심함이라는 친구. 납득이의 낯 뜨거운 조언과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연애'에 대한 정의조차도 경이로웠던 그 시절.
지금도 멜론 플레이리스트에서 종종 흘러나오는 '기억의 습작'은 진정한 기억의 향수였고
CD플레이어와 GUESS, 힙합바지와 무스, 삐삐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그 시절 소품들은 자연스레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사소에 사건에 대한 주인공의 소심한 과민반응과 체념은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시시각각 돌변하는 사랑의 감정과 늘 알 수 없어 상상만 했던 그녀의 진짜 마음을 스크린으로 보고 있노라니 이제서야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게 되었다. 뒤늦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이제훈이 나였고, 내가 바로 이제훈이었다. 그렇지!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고.
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 건축학 개론은 우리 모두의 영화가 되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소심하고 유치했을까.
그 때는 왜 너가 다른 누구를 좋아하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슬프고 서러웠을까.
그 때는 왜 너를 좋아한다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 때는 인정하기 싫었다. 거절당할까 표현하지 못한 용기 없는 짝사랑의 벅참에 혼자 도취해 있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슛이 없으면 득점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골키퍼라도 날라오는 모든 유효슈팅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잠시 엇나간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듯, 마음을 추스려 보지만 그 때쯤 영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잠시 아프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방 현실에 적응하고 또 그렇게 망각하거나 혹은 치유되었다고 착각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첫사랑의 설레임과 바보같은 나 자신의 행동과 때늦은 후회. 빈부 격차와 헌신적인 어머니의 자식 사랑. 가장 보편적인 사람이 일상에서 마주칠 법한 감정의 소용돌이와 이해와 치유의 변주. 주인공의 나약함과 소심함, 지금 현실의 척박함에 많은 3~40대의 남성들이 이제훈에 나를 투영시키며 납뜩이와 함께 간만에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엄태웅 혹은 이제훈은 소심하고 못났던 그 시절의 짝사랑이 혼자만의 쇼가 아니었음을 확인하며 깊숙히 묻어두었던, 아픔 가득했던 첫 사랑의 상처에서 붕대를 걷어 내었고 한가인 혹은 배수지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의 상처를 딛고 아직도 나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며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첫사랑의 시작과 설레임에서 사랑의 증표로, 실망과 분노의 표출에서 다시 약속의 증표로, 오래된 상처에 대한 치유를 전담하던 '전람회 1집 CD' 와 경솔하고 어리석었으며 철없던 아들을 사랑으로 응원해 주셨던 어머니를 대변하는 'GEUSS' 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 아쉽게도 건축학 개론 OST는 CD로 발매되지 않았지만, 수록 1번곡 '체념'의 기타 소리가 아직도 마음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