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어른의 꿈

by 이유있는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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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 (La La Land, 2016)


※ 스포일러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샛노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흔들리는 걸음으로 어둡고 쌀쌀한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지친 발걸음을 잠시 머물게 한 것은 어느 작은 레스토랑 안에서 조용히 새어 나오던 피아노 소리.

공허한 그녀의 마음을 순식간에 이끈 외로운 피아노 선율을 연주하던 한 남자.

바로 미아와 세바스찬의 첫 만남이었다.




<위플래쉬>로 예술성과 인간의 정상 상태(normality)에 관한 독특한 연출을 보여주었던

<다미안 차첼레, Damien Chazelle> 감독은 어느 추운 겨울에 또 하나의 잊혀지지 않을 작품을 가지고 돌아왔었다.


나이 든 어른의 꿈은 순수한 그 시절 나의 예전 꿈과는 많이 다르게 마련이다.

작고 큰 성공에 눈을 떠 가며 우리는 예전에 가졌던 때 묻지 않은 시절의 순수한 꿈과는 꽤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에 '철'들었다는 대답으로 합리화를 하곤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설레는 꿈을 잠시 접어 두고, 성공을 위해서는 혐오하던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철'든 어른들의 자기 합리화. 그래서 꿈꾸던 일을 열정적으로 하면서 더불어 금전적인 여유까지 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거장'이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한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느껴지던 압도적인 먹먹함은 이야기의 주제를 시각/음향적으로 극대화하여 관객에게 세련되게 전달하는 연출의 힘. 오랜만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지 않았으면 하는 영화를 만났다는 기쁨은 소소한 덤이 아닐까. 다소 올드한 이야기의 구성과 예상 가능한 캐릭터의 행동은 진부한 느낌도 들게 하지만, 오히려 모든 신경을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인간 심리, 꿈과 사랑, 돈과 행복 같은 흔한 주제들로 탁월한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데미안 감독의 작품이 언제나 기대되는 이유다.


어쩌면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래서 꿈을 위해 노력하고 인내하는 그 순간이 (지나고 보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록 미아와 세바스찬은 헤어졌지만 좌절 문턱에 있던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믿어줌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큰 성공으로 이끈 '관계'의 힘을 증명해 내었고, 순수하던 오래전, 늘 마음속에 간직하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향수와 '그 시절' 나의 편이 되어주었던 보편적인 '그 사람'에 대한 대중의 향수를 자극한 게 아닐까.


누군가는 라라랜드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흘렸던 눈물의 의미에 대해,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그 눈물은 오래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내 꿈'에 대한 먹먹한 미안함과 그리움 때문이었지도 모른다. 그토록 원하던 꿈을 모두 이루고 난 뒤의 금전적 여유와 유명세에 파묻힌 미아의 마지막 모습은 글쎄, 행복해 보였던가? 적어도 내겐 본인이 지어준 이름의 SEPS라는 재즈바에서의 미아의 표정은 못 이룬 과거의 추억보다는 시간을 뛰어넘은 현재의 감동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다. 당당히 커피를 주문하던 현재의 유명 배우 미아보다는 커피를 주문하는 유명 배우를 동경하던 알바생 미아가 더 아름다웠듯이.


결국, 그들의 사랑은 성공했다. 내재된 가능성에 불과했던 원석 같은 재능을 알아봐 주고 달성 가능한 길로 이끌었으며, 좌절의 순간마다 같은 편이 되어 주고 서로 힘을 북돋아 주었다. 성공의 후반부까지 둘은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같이 지낼 수 없어서 이 사랑은 과연 실패였을까? 가장 불확실하고 깜깜했던 인생의 어느 순간, 서로에게 빛과 영감이 되고 이후의 삶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변화의 길로 인도한 대단한 '선물'을 주고받았기에 그들의 사랑은 해피 엔딩임에 분명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멋진 음악으로 담담하게 그린 영화가 바로 내겐 라라랜드였다.




새벽녘의 진한 보라색 하늘과 미아의 노란색 원피스가 주는 강렬한 색상의 대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보랏빛 새벽은 길고 쓸쓸한 하루의 엔딩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노란빛 희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약속의 시간이기도 하다. 어스름한 새벽하늘에 빛나던 미아의 희망적인 노란색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다. 그걸 한 눈에 알아보는 당신의 세바스찬을 꼭 만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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