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과 삶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을 위로한다고 애쓴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에서 그는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갈 것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한국 최고의 예인이 한마디 툭 던진 말이었지만 오래도록 생각이 맴돌고 있다. 하나 더, 나는 그다지 트로트를 즐기지는 않지만,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노래는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어떻게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감히 테스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만의 기발한 생각 또한 존경스러웠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꼭 그래야만 한다면 한 가지 조건,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노래에 대한 달란트는 부족하지만 나훈아나 조용필 같은 아티스트들의 콘서트나 쇼 무대에 설 수 있는 직업적인 백 댄서로 태어나고 싶다. 특별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무엇을 하고 싶으면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도 무슨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왜 우리의 삶을 제도권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이렇게 속박하고 힘들게 하는지, 이유 없는 반항과 함께 궁금할 때가 있었다.
우리 자신도 자연의 일부라고 하고, 그런 우리의 삶도 자연의 일 부분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 인간 만이 삶을 살아가는데 무슨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되고, 왜 또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것에 우리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푸른 하늘을 나는 딱따구리가 무슨 자아실현을 위해 학습하고 노력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태어났으니까 먹어야 하고 또 날개에 새털이 돋아나니까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무 둥지에서 목숨을 걸고 뛰어내린 후 독립한다. 그리고 어미가 열심히 벌레를 물어다 먹여주고, 사랑의 날갯짓으로 비바람을 막아주던 둥지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 딱따구리 어미새가 둥지를 떠난 새끼 딱따구리를 원망한다거나, 아니면 추석 명절에 새끼 딱따구리가 천리 먼길을 날아와 어미 딱따구리의 둥지를 방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어미 딱따구리가 흘러간 세월을 후회하고 새끼 딱따구리가 효도 안 한다고 서운해한다는 얘기도 들어보질 못했다. 모든 자연의 섭리가 새끼가 성장하고 독립할 때가 되면 정든 둥지를 떠나 각자 그들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새끼 딱따구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어미가 먹을거리와 둥지를 물려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면 그 둥지 옆에 새끼가 살 수 있도록 새둥지를 마련해주었단 얘기도 들어보질 못했다. 그 딱따구리들이 삶의 행복이 무언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맨날 고민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냥 자연의 이치대로 그 새끼 딱따구리들은 또 어미 딱따구리가 살았던 것처럼 , 자신한테 주어진 삶을 고민 없이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왜, 도대체 우리 인간만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살아가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연의 삶을 강조하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사회문제는 이런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거스르는 데서 모든 원인이 있고 출발점이 된다. 세월이 살결에 주름을 만드는 것을 염려하고 안티 에이징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다. 또한 둥지를 물려주기 위해 위장전입을 하고, 둥지를 두세채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친다. 인간의 모든 탐욕스러운 돈벌이는 이런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데서 그 방법을 찾고 투자 수단이 된다.
가수 나훈아도 세상이 왜 이런지 정말 궁금해서 소크라테스한테 나이 칠십이 훨씬 넘어서야 노랫말로 물어본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테스형도 모른다고 했단다. 그러면 흘러가는 세월을 뭐 어떻게 막겠다고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나이 먹었다고 세월에 뒷목이 잡혀 끌려가면서 꼰대 짓 하지 말고, 세월의 모가지를 잡고 끌면서 그 세월의 흐름에 맞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믿는다. 그의 말처럼 꿈꾸고 도전하는 삶, 맨날 하던 짓 말고 안 하던 짓을 해야 세월이 늦게 간단다.
자연의 숲 속에서 살아가는 딱따구리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울고, 날아다니겠는가. 아니면 딱따구리로 태어났으니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고민하며 살겠는가. 우리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그들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어미 딱따구리가 자기한테 벌레를 잡아다 먹이고 사랑으로 돌봐준 것처럼, 그 새끼 딱따구리도 커서 독립하면 새로운 둥지를 짓고 새끼를 낳아서 벌레를 물어다 키우고 또 그렇게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에서
우리 인간은 보이지도 않는 제대로 정의할 수도 없는 행복한 삶에 너무 집착하고, 그 행복을 위해 치열하게 생활하다 지칠 땐 오히려 불행하다며 삶을 포기하고 망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맨날 무슨 계획 세우고 목표 정하지 말고, 가끔은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고 그냥 눈뜨면 먹고 졸리면 자고 그렇게 단순하게 살면서 잠시 멈추고 쉬었다 가면 삶이 치유될 수도 있다. 머리 복잡하고 몸이 힘들 때는 그게 자연의 일부인 우리한테는 진정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자연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치유한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어떤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곧 인간만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맨날 돈 벌 생각만 하지 말고, 가끔은 생각 좀 하고 살 일이다.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동물은 본능에 갇혀 살고, 인간은 제도권의 틀에 갇혀 산다. 그 틀에 갇혀 살다 보면 죽을 때까지 그 틀 밖의 무지개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혼이 자유로운 나훈아처럼 그 틀을 벗어날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두려워 오래된 고통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