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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Feb 17. 2023

삶은 개떡같이 살다가 잘 죽을 수는 없다

캄뷰세스 왕의 재판


 결혼 초에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몇 년간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던 때가 있었다. 핑계 같지만 잦은 학내시위로 휴교와 휴강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부와 독서를 멀리했다. 반면, 사회과학으로 잘 무장된 아내에게 부부싸움에서 맨날 깨지기만 했던 나의 열등감 때문에 뒤늦게 사회과학 서적을 포함 소설, 시집, 영화, 미술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현실은 구름 위에 사는 게 아니고 땅을 밟고 사는 것이라는 아내의 걱정을 듣고야 멈추었다. 그때 아내가 사다 놓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작과 비평사, 서경식)라는 책을 읽었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에도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미술관을 순례하고 기행문처럼 써 내려간 책이라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덕분에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도 ‘서양 미술 순례’를 하고 싶은 꿈이 생겼었다.



 그 후 해외 출장과 여행 때마다 그 도시에 있는 대표 미술관을 둘러보았고 지금은 ‘나의 서양 미술 순례’에서 저자가 둘러본 절반의 미술관을 방문했다. 해외 비즈니스를 오랫동안 했기에 운이 좋았고, 그래서 나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는다. 최근 총체적 사법 불신을 불러온 몇몇 재판 결과 때문에 문득 그 책에서 첫 번째로 저자가 벨기에 호로닝헤미술관에서 만났던 ‘캄뷰세스 왕의 재판’(The Judgment of Cambyses)이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출처, 인터넷이미지(캄뷰세스 왕의 재판)


 헤럴드 다비드가 그린 그림으로, 캄뷰세스 왕은 기원전 6세기에 재위한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전제군주였고 그림 속에서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당하는 사람은 시삼네스라는 판사라고 한다. 뇌물을 받고 납득할 수 없는 상식이하의 판결을 내린 재판관을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가죽을 벗기는 섬뜩한 장면을 담아냈고, 그 벗긴 가죽으로 의자를 만들어 새로운 재판관에 그의 아들을 임명해서 앉혔다는 이야기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빨간 옷을 입은 아이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처리가 흥미롭다.


낙산사 의상대


 최근, 그 납득할 수 없는 몇몇 재판을 한 재판관들도 생계를 책임질 식구가 생기고, 또한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초심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칠십까지만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라 투표할 생각이고, 그다음부터는 당대인 너희들이 선택하는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니 그 후보를 정해달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이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늙고 변할 수밖에 없다. 그 변화의 방향성이 반드시 옳은 방향만으로 변해간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젊을 땐 누구처럼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이면 아무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품위와 인품이 저절로 높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살아보니 경험에 의한 확신 때문에 고집만 늘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기 위한 학습량의 부족으로 점점 모르는 분야가  많아지고, 오히려 많은 경험 때문에 걱정이 앞서고 어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게다가 인간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는 지적 호기심과 열정마저 잃게 되면 최악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난 후 누가 묻기 전에는 함부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하지 않는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잘 모르는 일엔 섣불리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템포 쉬고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좋은 모습으로 생활하려면 계속 학습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함부로 오지랖 떨지 말고, 자신부터 정신을 똑바로 챙기고 살아야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식과 경륜이 늘고 인격이 높아질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무식이 늘고, 절제하지 않으면 탐욕이 늘며, 성찰하지 않으면 파렴치만 늡니다. 나이는 그냥 먹지만,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습니다."라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삶은 개떡같이 살다가 잘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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