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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pr 21. 2023

온전한 내 편 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다

가사노동


 휴일 늦은 아침에 일어나 먼저 커피를 내리고 베이글과 과일을 담아와서 거실 아내 옆에 앉아 TV를 함께 보았다. 어제 오후 늦게까지 아내가 친구들을 만나고 온 것을 알기에 내가 먼저 안부를 물으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시집 장가간 아이들의 사는 얘기와 함께 이제 은퇴를 했거나 곧 은퇴를 하게 되는 남편들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중 한 친구는 중소기업 사장인 남편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출근하고 일을 줄이면서 은퇴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집에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사소한 일로 자주 싸운다며 벌써 은퇴 이후의 생활이 걱정된다고 했단다. 그 싸움의 이유를 들어보니 예를 들면, 집안 물건을 쓰고 어디에 놓아두라고 말했는데 언제나 그 말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아무 데나 놓아두게 되니 기분이 나빠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남편은 또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며 대든다고 했다.


통영국제음악당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남자들은 대개 은퇴할 쯤이 되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대부분 지시받아 일하는 위치가 아니라 어떤 일을 기획하고 지시를 하는 입장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다. 따라서 가정에서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보단 습관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결정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밖에서 일하는 동안 남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밖에서 나라의 장관을 했든, 기업의 대표이사를 했든 가정에서만큼은 오랫동안 독박 육아, 독박 가사노동을 하면서 나름의 집안 살림살이를 운영해 온 가정의 장관이고 CEO이기 때문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아내 입장에선 이제 은퇴를 하고 가정으로 돌아와 가사노동에 편입된 겨우 인턴 수준의 남편을 가르칠 입장도 아니다. 회사로 따지면 대표이사가 인턴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 직접 가르치는 꼴이다. 내 경험상 회사에서 그런 일은 없다.



 또한, 아내는 오랫동안 집안살림을 경영해 오면서 나름의 경영 철학과 원칙이 있는데 겨우 인턴 정도가 그 원칙과 철학을 무시하고 멋대로 자기 생각대로 해버리는 꼴이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일상이 흐트러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혼란스러움을 경험하게 되니 당황스럽고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라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의 MZ세대처럼 부부가 공평하게 회사 일과 가사노동을 함께 해왔다면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독박생계, 독박 육아와 가사노동을 해왔던 지금의 50,60대 부부가 겪는 일일 뿐이다. 밖에서 무슨 일을 했든, 아니 지구를 구한 슈퍼 히어로일지라도 그들이 돌아갈 곳은 결국 가정이고 가족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최소한 가사노동만큼은 집안살림의 대표이사 격인 아내의 말을 잘 듣고 지시에 따라야 한다. 아니, 오히려 대표이사가 신입 인턴에게 직접 지시하고 가르쳐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뒤늦게 가사노동에 참여하게 된 남편들은 삼십 년 넘게 혼자 전담해 온 아내들의 가사노동의 내공을 당할 수도 없거니와 서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될 수 있다. 내가 밖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회사일에 대해 아내가 이런저런 참견이나 지시를 하고 나를 무시한다면 자신도 스스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깨지고 욱하는 마음에 괜히 밖에 나가 사무실 구해놓고 허세를 떨어봐야 서로가 적응해 나갈 시간만 줄어들 뿐이고, 함께 행복할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들이 이제 와서 가사노동에 조금 참여하는 것을 가지고 생존의 몸짓이니 가정의 평화를 지키네 어쩌고 유세를 떨어봐야 꼰대소리 듣기 십상이다. 훌륭한 우리의 아들과 딸, MZ세대들은 이미 그렇게 부부가 가사노동을 협업해 생활해 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내들도 할 말이 많았지만, 밖에서 생계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당신을 위해 그저 인내하고 배려해 왔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남만 배려해 왔던 남 편, 지난 일은 모두 잊고 “고맙습니다!!!”  열 번 복창하고 이제부터라도 아내와 함께 서로 협업해야 한다.


 온전한 내 편 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치열하게 생활했던 이유가 가족을 부양하고, 은퇴 이후에 아내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뭐, 아니라 그러면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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