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고지
2023년을 떠나보내며 경기도 화성에 있는 남양성모성지의 대성당을 둘러보기 위해 일어나 집을 나섰다. 세계적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인 그 대성당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오래전부터 찾아보고 싶었지만 보수공사를 한다는 소식에 계속 미루었었다. 화성의 가까운 호텔을 미리 예약하고 하루 묵으면서 새로 생긴 제부도 해상케이블카도 타보고, 제부도 매바위와 제비꼬리길도 다시 한번 산책하기로 계획했다.
나는 성당에 다니지는 않지만, 공식적인 문서의 종교란에는 늘 천주교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서울시내에서 근무했던 군복무 시절, 일요일 오전마다 가까운 초등학교로 가서 하는 축구사역이 싫어서 종교인으로 행세하며 명동 성당의 11시 미사에 참석하곤 했다. 또한 지금도 가끔 저녁산책을 할 때마다 가까운 동네성당의 성모상 앞에서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건축은 잘 모르지만 강남역 교보타워 빌딩을 설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진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창의력은 가히 존경할 만했다. 아침부터 서두른 덕분에 오전 11시에 열리는 미사에도 참석했지만 명동성당 미사참석 이후 너무 오랜만이라 그냥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날은 올해 최고의 강추위가 몰아닥친 덕분에 연일 영하 15도에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오르내렸던 날이었다.
신부님의 강론은 성모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 수태고지‘를 받고 문득 일어나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사촌언니 엘리사벳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였다. 중동에선 지금도 그렇지만 2천 년 전에 순결한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곧 돌팔매질에 의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 엄청나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임신 6개월의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문안하기 위해 ‘일어나서’ 집을 나섰다는 말씀이었다.
남양성모성지를 방문한 날, 강추위에도 마다하지 않고 마침 그날 미사에 참석한 대략 20분 정도의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말씀이었다고 해석되었다. 일주일 전부터 최강추위가 닥친다는 뉴스를 보고 연말에 아내를 배려한다고 계획을 세웠던 이번 여행을 취소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일어나 집을 나섰던 내게 큰 위로가 되었던 강론이라 졸지 않고 말씀 하나하나 열심히 들었다.
해외 비즈니스를 갈 때마다 시간을 내서 해외 유명미술관을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Uffizi) 미술관에서 처음 만났던 그 그림이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수태고지’와 ‘프리마베라’, ‘비너스의 탄생’이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한 것을 가리키는 그림이다.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신의 은총으로 예수를 낳을 것‘이라 말하자,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는 장면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요한)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리고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그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거룩한 성탄절인 것이다. 현재 세계 인구 중 대략 23억 명의 기독교인과 19억 명의 이슬람교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중 이슬람교를 믿는 팔레스타인인과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인은 모두 함께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자손들이다. 실제 2020년 9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에 ‘아브라함 협정’이 체결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아니 이젠 일방적인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로 인한 가자지구의 초토화 결과 벌써 2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고, 가자지구 주민 85%가 하루 한 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난민이 되어 굶주리고 있다. 더불어 올해 베들레헴의 모든 성탄축하 행사는 취소되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성스러운 팔레스타인 땅에서 더 이상 전쟁난민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기도했다. 또한 하마스의 잘못된 투쟁방식을 비난하고, 이제 그만 그들이 억류하고 있는 죄 없는 이스라엘 시민들을 따뜻한 가족들의 품으로 곧 돌려보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에서 자비가 솟아날 수 있기를 성모 마리아 님 앞에서 촛불을 밝히고 기도했다. 폭력으론 아무도 못 이긴다. 오직 품위를 지킬 때만 이길 수 있다.
지난가을부터 시작된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전쟁범죄로 인한 뉴스와 함께 세계의 뜻있는 지성인들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전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미친 짓일뿐더러 어떤 명분으로도 용서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짓임을 그들이 기억하길 바란다. 영화 ‘쑈생크 탈출’(1995)의 교도소장 노튼의 사무실 벽에 걸려있던 구절처럼, 반드시 그 “심판의 날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