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와 습관
대설이 지나면서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날, 아내와 함께 가까운 오산 독산성 세마대지로 드라이브 겸 산책을 다녀왔다. 성과 궁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평소 눈여겨보아 두었던 독산성을 선택했다. 성(castle)과 궁(palace)은 역사적 서사와 최고의 미적 감각으로 만들어낸 정원이 있기 때문이란다.
대개 궁은 서울에 5대 궁궐이 몰려있기 때문에 큰 수고가 필요 없지만, 그에 반해 성은 신라, 백제, 고구려등 전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핑계 삼아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을 여행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가가 있다. 또한,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오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게 된다.
아름다운 독산성을 한 시간가량 한 바퀴 돌고 난 후, 문득 아내가 좋아하는 삼성동에 있는 간장게장 전문집으로 좌표를 찍고 서울로 출발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내는 며칠 전 내가 후배로부터 선물 받은 과자를 꺼내먹기 시작했다. 과자가 너무 맛있다며 그 후배에게 고맙다고 다시 카톡을 보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 선물을 받을 때 이미 고맙다고 인사를 했으니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먹어보니 맛있다고 또 감사카톡을 보내는 게 그리 힘든 일도 아닌데 다시 카톡을 보내라고 말했다. 물론 아내의 말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남자들끼리의 언어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내는 여자들끼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선물을 받을 때 감사인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어보고 맛있으면 또 카톡을 보낸다고 말했다. 오히려 먹어보고 쓰다 달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언어로는 그 선물을 받았을 때 감사의 인사말을 했으면 그만이지, 그 선물을 먹어보고 또 감사카톡을 보내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이유는 또 감사카톡을 보내면 상대방이 다음에 만날 때도 그 선물을 가지고 나가야 되나 하는 부담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는 습관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선물의 과자를 먹어본 소감은 다음에 다시 만날 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주는 것이 남자들의 언어인 것이다. 물론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 과자를 찾아 주문해서 먹고 있다.
내 설명을 듣고 그제야 아내는 남자와 여자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언어의 온도와 습관이 다른 것 같다고 말하며 이해했다. 쉽게 말하면 같은 중국어를 사용하지만 칸토니즈(광둥어)와 만다린(중국 보통화)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 기성세대 중 삼십 년 이상 생계를 위해 사회생활을 한 남자들의 언어와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며 생활한 여자들의 언어는 그 차이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언어의 온도와 습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회생활을 마치고 남자들은 그동안 소홀했던 아내를 위해 해외 패키지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그동안 하루 두 시간도 함께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패키지여행을 가면 언어와 습관이 다른 상태에서 하루 24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결혼 이후 최고난도의 위험에 던져지게 되고 대폭발을 경험할 수도 있다. 먼저 조금씩, 느리게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 때까지 패키지여행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또한, 첫 만남 이후 서로 최고의 모습과 다정함으로 네댓 시간 데이트만 하다가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대개 일주일간의 고난도 모험에 던져지게 되는 신혼여행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래도 신혼여행은 설렘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 언젠가 라디오음악에서 들었던 한 청취자의 사연이 생각났다.
그 청취자가 글씨를 예쁘게 쓰는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한 자 한 자 천천히 정성을 다해 느리게 쓰면 된다고 말했고, 그렇게 했더니 정말 점점 더 글씨를 잘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피아노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처음 배울 때는 천천히 치고, 매일 조금씩 꾸준하게 반복하다 익숙해지면 자신의 리듬을 찾고 원곡대로 치면 된다고 말했다. 무엇이든 매일 조금씩, 꾸준하게 반복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내 또한 충분히 공감했다. 앞으로 역지사지( 易地思之),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살아가자고 의기투합했다. 삶, 또한 끊임없는 반복이니까.
대개 누구나 그렇듯, 사실 아내가 내게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다. 아내가 하는 말 잘 귀담아 들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너무 쉽다. 다정은 늘 공짜니까. 반면, 가끔 그것을 잊었을 땐 너무 어렵다. 겨울 내내 입맛을 잃었던 아내는 내가 사준 미슐랭 맛집, 간장게장 덕분인지 다시 입맛을 찾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명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