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
가끔 혼자 있을 때 라면을 끓여 먹을 때가 있다. 뉴스를 보니 한류 드라마 덕분에 세계적으로 라면 수요가 많아져 수출 1조 원을 돌파했다고 한다. 언젠가 김훈 작가가 ‘라면을 끓이며’(문학동네)라는 산문집을 출간했고, 궁금해서 사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독서메모에 어떤 글도 없는 것을 보면 기억에 남는 글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라면을 끓여 먹을 때마다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2004)이 먼저 떠오른다. 트럼펫 연주자인 현우(최민식)가 자신의 답답한 현실을 뒤로하고 강원도 삼척에 있는 도계중학교 관악반 임시교사로 새롭게 부임하게 되면서, 그 탄광촌의 임시숙소에서 몇 번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이 있다.
철제반상에 냄비채 올려놓고 라면을 먹으려던 순간, 그가 보던 TV뉴스에서 노숙자가 길에서 끓인 라면을 한입 먹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입안 가득 물었던 라면을 뱉어내며 헛웃음을 삼키는 장면이었다. 가끔은 혼자 있을 때 라면을 끓여 쟁반에 들고 와 거실책상 위에 올려놓고 먹을 때마다 그 장면이 생각나곤 한다. 그래도 내가 먹는 라면은 대파, 계란, 떡까지 넣은 떡라면이지만, 라면은 라면일 뿐이다.
사실 그 영화는 지금은 고인이 된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조감독이었던 류장하 감독의 데뷔작품이다. 유난히 겨울이 길고 추운 탄광촌에서 따뜻한 희망을 찾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혹한의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따뜻한 봄날은 기어이 오고 만다는 사실과 더불어 주변 이웃들과 함께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희망을 찾아가는 깊은 감동이 있는 영화이다. 또한 그의 옛사랑 연희(김호정)가 바닷가에서 트럼펫 연주를 듣고 눈물짓던 그 영화의 테마음악이 너무 좋았다.
트럼펫 연주자인 현우는 서울에서 교향악단 연주자를 꿈꾸지만, 자신의 꿈을 잠시 접고 현실을 도피하듯 탄광촌에 있는 중학교 관악반 임시교사로 부임한다. 그런 현우가 관악반을 지도하면서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고 또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찾아간다는 플롯이다. 그 영화 속의 탄광촌 어느 식당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현우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서울에 있는 어머니(윤여정)와 통화하는 장면이 있다.
"엄마. 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냥. 뭐 든 지."
"넌 지금이 처음이야. 뭘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해."
인생 너무 멀리 내다봐서 좋을 게 없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영화의 배경이 된 삼척의 탄광에서 일하는 용석의 아버지(최일화)가 현우에게 말했다. “꿈, 오랜만에 들어보네. 나도 꿈이 있었지. 막장일이 내 꿈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일이 다 내 뜻대로 됩디까 “하는 말이다.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말처럼, 인생이 꿈을 만드는 게 아니라 꿈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까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없다. 그저 그 꿈을 위해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 많은 인고의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 자신이 된다. 지난 연말 많은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말했던 수상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꿈을 향해가던 팍팍한 현실의 삶 속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지만 존버했고, 그 ‘일만 시간의 법칙’이 작용했던 것이다. 진정한 실패는 꿈을 포기하는 그 순간이란 말이 있다. 라면을 끓일 때도 마찬가지다. 물이 끓는 것도 결국 99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100도가 되는 그 순간, 드디어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막장에서 일하는 용석의 아버지와 광부들이 일을 끝내고 탄광을 걸어 나올 때, 그의 아들 용석과 함께 중학교 관악반 단원들이 억수 같은 가을찬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도교사 현우의 지휘에 맞추어 엘가의 ‘위풍당당행진곡’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또 하나, 도계중학교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스스로 희망을 되찾고 꽃피는 봄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연희가 사는 구축 아파트의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녀와 통화하는 장면이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봄날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