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눈이 부시게
몽골 트레킹을 다녀와서 또 연이어 일정 두어 개를 더 소화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늦은 아침 거실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던 아내와 함께 우연히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의 최종회를 보았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혜자(김혜자)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특히 감동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던 드라마였다.‘주어진 시간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여자와 누구보다 찬란한 순간을 스스로 내던지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남자,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남녀의 시간 이탈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였다.
최종회에서 주인공 혜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중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 후 육아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일간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혜자의 남편(남주혁)에게 아내 혜자가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를 봐달라고 했지만 자신의 일에 몰두하던 남편은 아이가 까만 잉크를 뒤집어쓴 것도 몰랐다. 혜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남편을 책망했다.
함께 그 드라마를 보던 아내가 내게 당신도 그 장면을 보면 생각나는 게 없느냐며 첫아이를 출산하고 내가 병원을 찾았던 모습을 회상하며 웃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점심때쯤 아이를 낳았다고 전화를 했는데, 회사일을 모두 마치고 장미꽃을 사들고 와 해맑게 웃으며 ‘축하해’라고 말했다고 했다.
또한, 그 말을 듣고 아내 역시 해맑게 웃었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첫 아이를 낳았는데 첫마디가 ‘축하해’ 보다는 ‘고마워’ 또는 ‘수고했어’ ‘괜찮아?‘하고 말하는 게 맞는 것 아니었냐며 나의 젊은 날, 미숙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아내와 재미있게 돌아보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첫아이를 낳았을 때 아내의 병실을 찾았던 순간, 장모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출산 소식을 듣고도 무사히 출산했으면 됐다며 바쁜 회사일을 모두 끝내고 퇴근 후, 로맨틱하게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해맑게 웃으며 병실로 들어서는 철없는 사위를 보고 뭐라 말씀은 못하시고 쓸쓸하게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한 번쯤은 제대로 그 해프닝을 사과드렸어야 했는데 많이 아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결혼생활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가 그나마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한 일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드라마를 보고 아내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그때의 내 행동이 무엇이 문제인 줄은 잘 알지만, 아내 또한 그땐 그 장미꽃을 받고 해맑게 웃었을 뿐이었다. 세상에 무엇이 중한지도 몰랐고 어리석었던 내가 최고 정점에서 무사히 회사생활을 마치고 ‘당신과 함께 나태한 생활을 하는 것’이란 꿈을 이루었으니 별거 없는 인생, 이만하면 됐지 하고 잘 살면 된다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은 그저 우리가 사는 복권 같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복권을 사지 않으면 1등에 당첨될 일도 없으니까. 어떤 일이든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이룬 성과와 실력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좋은 선배, 훌륭한 후배를 만났고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처럼 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 항상 삶에 감사할 수 있다. 추억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연료 같은 것이다. “나이는 성숙함의 정도가 아닌 성숙할 수 있었던 기회의 수를 나타낼 뿐이다. 기회는 머물다 갈 뿐 누적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이가 성숙의 정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을 그저 반복되는 원이 아닌 나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가 들고, 이젠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숨 쉬는 것, 생각하는 것, 즐기는 것, 사랑하는 것 등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특권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닌가.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된다. 우리의 삶이란 존버하는 것,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