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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n 27. 2024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 늘 감사할 수 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몽골 트레킹을 다녀와서 또 연이어 일정 두어 개를 더 소화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늦은 아침 거실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던 아내와 함께 우연히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의 최종회를 보았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혜자(김혜자)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특히 감동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던 드라마였다.‘주어진 시간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여자와 누구보다 찬란한 순간을 스스로 내던지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남자,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남녀의 시간 이탈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였다.


비수구미, 강원도 화천


최종회에서 주인공 혜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중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 후 육아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일간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혜자의 남편(남주혁)에게 아내 혜자가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를 봐달라고 했지만 자신의 일에 몰두하던 남편은 아이가  까만 잉크를 뒤집어쓴 것도 몰랐다. 혜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남편을 책망했다.


개망초


 함께 그 드라마를 보던 아내가 내게 당신도 그 장면을 보면 생각나는 게 없느냐며 첫아이를 출산하고 내가 병원을 찾았던 모습을 회상하며 웃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점심때쯤 아이를 낳았다고 전화를 했는데, 회사일을 모두 마치고 장미꽃을 사들고 와 해맑게 웃으며 ‘축하해’라고 말했다고 했다.



또한, 그 말을 듣고 아내 역시 해맑게 웃었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첫 아이를 낳았는데 첫마디가 ‘축하해’ 보다는 ‘고마워’ 또는 ‘수고했어’ ‘괜찮아?‘하고 말하는 게 맞는 것 아니었냐며  나의 젊은 날, 미숙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아내와 재미있게 돌아보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첫아이를 낳았을 때 아내의 병실을 찾았던 순간, 장모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출산 소식을 듣고도 무사히 출산했으면 됐다며 바쁜 회사일을 모두 끝내고 퇴근 후, 로맨틱하게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해맑게 웃으며 병실로 들어서는 철없는 사위를 보고 뭐라 말씀은 못하시고 쓸쓸하게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한 번쯤은 제대로 그 해프닝을 사과드렸어야 했는데 많이 아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결혼생활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가 그나마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한 일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드라마를 보고 아내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그때의 내 행동이 무엇이 문제인 줄은 잘 알지만, 아내 또한 그땐 그 장미꽃을 받고 해맑게 웃었을 뿐이었다. 세상에 무엇이 중한지도 몰랐고 어리석었던 내가 최고 정점에서 무사히 회사생활을 마치고 ‘당신과 함께 나태한 생활을 하는 것’이란 꿈을 이루었으니 별거 없는 인생, 이만하면 됐지 하고 잘 살면 된다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은 그저 우리가 사는 복권 같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복권을 사지 않으면 1등에 당첨될 일도 없으니까. 어떤 일이든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이룬 성과와 실력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좋은 선배, 훌륭한 후배를 만났고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평화의 댐, 화천


그처럼 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 항상 삶에 감사할 수 있다. 추억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연료 같은 것이다. “나이는 성숙함의 정도가 아닌 성숙할 수 있었던 기회의 수를 나타낼 뿐이다. 기회는 머물다 갈 뿐 누적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이가 성숙의 정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을 그저 반복되는 원이 아닌 나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로호


나이가 들고, 이젠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숨 쉬는 것, 생각하는 것, 즐기는 것, 사랑하는 것 등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특권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닌가.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된다. 우리의 삶이란 존버하는 것,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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