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일박이일의 관매도 섬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는데 아내가 아이의 여행용 캐리어의 바퀴를 수리할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언젠가 그 캐리어 바퀴 한쪽이 고장 난 것을 확인하고 인터넷검색을 통해 수리를 문의했더니 캐리어 가격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리비를 요구하길래 새로운 것을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이는 더 좋은 새것으로 여행용 캐리어를 사주겠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용해서 정이 들었다고만 생각했다. 나 역시 어느 날부터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물건에도 그 물건의 물성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사용해 온 손때 묻은 물건만큼은 그 기능을 다했을 때 바로 헌신짝 버리듯 하지 않고 그동안의 봉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반드시 표현하고 처리한다.
아무튼 오후에 그 캐리어를 싣고 인터넷에서 찾은 테크노마트 지하에 있는 새로운 수리센터를 찾아갔다. 수리를 맡기며 한쪽 바퀴가 고장 난 캐리어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더니 아마도 여행짐을 쌀 때 그 캐리어의 용도에 익숙해져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전문가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아이의 호불호를 떠나 무조건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했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말뿐이 아닌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를 잘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안에 누군가를 가두어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결국 소유와 집착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일 뿐이다. 삼십 년을 넘게 함께 살았지만 아이가 닭가슴부위를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동안 치킨을 주문할 때마다 매번 내가 좋아하는 닭다리 중 한 개를 아이에게 주었다.
아내가 싫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는 늘 바른생활 어른으로 교통법규와 생활의 규칙을 어기는 것을 싫어한다. 한적한 이면도로라고 무단횡단을 하거나 과속등 교통법규를 어길 때면 갑자기 좋은 분위기가 급냉각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운전을 하고 가는 동안 내내 아내의 걱정을 듣는다. 아내는 관매도를 가기 위해 진도팽목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세월호리본이 그려져 있는 팽목항 등대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했다.
곧 뱃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그 등대 바로 앞까지 가지 못하고 사진만 찍고 서둘러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그 때문에 아내의 핀잔을 듣고 한마디 하는 바람에 관매도 유채꽃밭을 산책하는 동안 재발방지 교육을 받았다.
아름다운 관매도를 보여주는 것이 중한 게 아니라 아내가 무엇을 필요(NEEDS)로 하고 좋아하는지(WANTS)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트위터에서 읽은 어느 의사가 쓴 글의 전문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아내에게 점수를 따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어떤 이에게는 굴욕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 듦은 겸손의 미학을 가르쳐준다. 사랑하는 이의 작은 미소를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
윗글을 쓴 결혼생활 27년 차의 그 의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성공은 아내에게 인정받는 것"이라는 말로 글을 끝맺었다. 섬트레킹을 하는 동안 아내는 보내준 그 글을 읽어봤냐고 물었지만 읽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관매도를 둘러싸고 있는 돈두산(220m)을 트레킹 하는 게 힘들기도 했고 서울로 올라갈 때 기차 안에서 읽고 싶었다. 젊을 때 전혜린의 글을 읽고 독서메모를 해놓았던 그녀의 글 한 구절이 늘 인생의 모토가 되었다.
"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
사랑하는 사람의 호불호(好不好)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의 외적 표현일 것이다.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인격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