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예술가와 천재적 예술작품에 관하여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이견을 제기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단어를 바꿔보자.
예술과 예술가는 구분해야 한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동안 나는 ‘I don’t know’를 ‘I don't care’로 바꾸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의식적으로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머리로는 상관없(어야 한)다면서도, 마음에서 드는 불편함을 감수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죄나 부도덕함을 같은 핏줄, 공동체,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의 연좌제 폐지는 무위(無爲)적 관점에서도, 당위(當爲)적 관점에서도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문제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예술, 콘텐츠에 이르면 무위와 당위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음(무위)의 영역인데, 좋아해서는 안되는(당위) 상황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작품을 만든 사람에 기인한다. 사람의 죄를 작품으로 연좌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고전이라 추앙하는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도덕성은 작품과 별개로 형편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피카소. 그가 사랑한 것으로 알려진(안 알려진 사람도 많다고 한다) 7명의 여인 중에는 (피카소 싱글시절) 유부녀, 친구의 약혼녀, 미성년자, 40살 연하녀도 있고, 연애나 결혼생활 중 바람을 피우는 건 보통일이었다.
예술가가 그놈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근래 나를 이런 고민에 빠뜨린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가장 논쟁적인 사례는 대마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도 했지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같은 사안이 불법이기도, 합법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저스틴 비버의 <Peaches>에는 아예 대놓고 Weed(대마초)라는 가사도 등장한다.
아티스트와 범죄를 논하려면 주관적으로 세 가지 기준이 떠오른다.
① 지역에 따라 합법이기도 한가
② 법에서 정하는 + 사회적으로 용인되는(a.k.a. 자숙) 죗값을 다 치렀는가
③ 죄의 결과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가 아니면 자기만 피해를 보는가
개인적으로 이 세 가지 기준을 and 조건으로 묶어야 할지, or 조건으로 봐야 할지 명확히 결정하지 못했다. 각 기준마다 생각도 다르다. 우선 ①에 대해서는 꽤나 열려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대마초의 경우 합법인 지역이 있기 때문에 사람도, 작품도 관대하게 대한다.
고민인 지점은 ②, ③의 경우다. 나는 ③을 가지고 ②를 판단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도박이나 마약은 죄의 성격이 자기만 피해 내지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죗값을 다 치렀다고 판단되면 불편함 없이 작품을 대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공인, 셀럽'이라 여기는 순간, ③의 논쟁이 무의미해진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는 대중에게 영향력을 주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유아인이 참 안타까웠다. 그의 최근작인 「지옥」 시즌 1, 「승부」를 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다. 「지옥」은 유아인의 마약 사건으로 동일인물에 대해 시즌 2에서 다른 캐스팅을 가져갔으며, 「승부」 역시 공개 시점에 맞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3년 넘게 빛을 보지 못하다 최근에 개봉됐다.
「지옥」 시즌 2에서 유아인의 역할을 이어받은 김성철에겐 미안하지만, 같은 씬을 연기하는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보자니 유아인의 공백이 더욱 드러났다. 특히 시즌 2에서 김성철이 맡은 사이비 교주 역할의 개연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간극을 연기력으로 설득해 내야 했는데, 김성철은 많이 모자란 느낌이었다. 볼수록 유아인이 그대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승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병헌과 부딪치는 씬마다 전혀 밀리지 않고 존재감을 보여줬으며, 원체 말이 없는 이창호라는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자세한 감상은 아래 참고) 아마 유아인은 언젠가는 복귀하지 않을까. 연기로 보답하겠다는 수많은 배우들의 전철을 밟으면서.
③의 관점에서 특히 음주운전은 모호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최근 들어서는 '음주운전자는 절대로 봐줘선 안된다'는 입장으로 가는 것 같다. 사실 음주운전이 미치는 피해 여부는 가능성의 문제지 결과의 문제는 아니다. '음주운전으로 누군가 피해를 입는다'는 명제는 인과관계보다는 상관관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1%, 아니 0.1%만 되어도 언제나 애꿎은 피해자를 발생시킬 수 있다. 글을 쓰며 다시금 '음주운전자는 복귀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물론 수많은 음주운전자들이 복귀해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나는 그들이 출연한 작품을 보면서 대체로 무감각하게 넘어가고 있다. 정말 마음 가는 대로 불편하지 않으면 보고, 불편하면 안보는 그런 수준이다. 이 수준에 대해 누군가 나의 도덕성을 탓한대도 핑계나 변명의 여지는 없겠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를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김애란'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녀가 고른 단어의 정서, 문장의 깊이, 표현의 안온함 모두를 감히 사랑한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어떤 가수의 <비행운>이라는 노래를 듣게 된다. 노래도 무척 좋았거니와, 제목부터 바로 김애란이 떠올라 더욱 좋았다. 노래는 내 플레이리스트에 담겼고, 늘 흥얼거렸다. 당시에는 당연히 '오마주'일 거라며 나도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해당 가수의 표절 소식을 듣게 된다. 놀랍게도 멜로디를 베낀 것이 아닌, 소설 속 문장을 베꼈고, 제목을 베꼈다. (원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로 멋대로 변용하여 썼다.) 그 소식이 들리자마자 그 노래는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가수가 몰카촬영범이라는 소식이었다. 그 이후로는 그 가수의 이름만 들어도 넌덜머리가 날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감히 내 최애 작가님의 작품을 좋아했고, (허락 없이) 인용했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사건 이후 한 선배로부터 전해 들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운전하다 노래를 틀었는데 <비행운>이 나왔어. 차에 탄 아내와 큰 아이가 노래를 꺼달라고 했는데, 막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노래에 무슨 죄가 있어?"
이야기를 들은 나의 마음이 갑자기, 몹시, 불편해졌다. 그리고 내가 참 좋아하는 가수, 김건모가 떠올랐다.
천재 영화감독이 있다. 내는 작품마다 국제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고, 수상도 잦다. 흥행과는 무관하지만 꾸준히 이름 있는 배우들이 노개런티로 작품에 출연하며, 출연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즉흥적으로 대본을 쓰기에 그만큼 촬영기간이 짧고, 배우의 실제 캐릭터를 거의 그대로 영화에서도 보여주며, ‘출연=국제영화제 출품’을 보장하기 때문인 걸까.
이 감독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캔들 상대는 뮤즈,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우다. 이 배우는 감독의 영화에 연이어 출연한다. 그리고 실제 연인이 된다.(연인이 되고 연이어 출연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최근엔 아이까지 출산했다. 이것이 축복받을 로맨스가 아닌 스캔들이 된 이유는, 감독이 기혼자라는 데 있었다.
감독의 영화를 한 두 작품 본 나로서는 다행히도(?) 취향에 맞지 않아 평소에 보지 않았다. 마침 더욱 보기 불편한 상황이 마련됐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닐 해외영화제 관계자들이나 국내 여론은 내 생각과 달리 쿨하다. 당사자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아닌 제3자가 왈가왈부할 영역이 아니라는 이유다. (그럼에도 왜 나는 그의 가족에 감정이입이 되는 것인지……)
지금의 나는 다른 이들의 생각을 70% 정도 받아들인 것 같다. 그가 연출하고 그녀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는 명백히 ‘취향’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 고민의 지점은 30%의 비중을 차지하는 정서적 불편함에 있다. 피카소의 작품은 거리낌 없이 보면서, 나는 왜 유독 이 감독의 작품을 불편해하는 것일까. 같은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인 걸까.
내가 동의할 수 없어도 법에 저촉되는 게 아니면
그 사람 의견을 존중하고 살았다.
나도 남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다
감독의 변(辯)이다. 내가 가장 놀랐던 지점은 '법'을 거론했다는 데 있다. 규정, 제도권, 이런 단어와 왠지 거리가 멀 것 같은 감독이 내세운 근거가 '법'이라니 좀 아이러니했다. 나의 불편함이 해소되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기준은 '공과 사, 직업인과 생활인의 구분'에 있었는데, 당사자가 법을 얘기하니 당황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아직도 내 마음속엔 법보다 감독 아내와 가족들의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런 고민들이 먹고사는 데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나에게는 나름 중요한 논제이기도 하다. 문제적 천재들의 작품을 아이에게 추천할 수 있을까. 아이가 나중에 그런 작품을 보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 답할 것인가. 그 대답을 위해 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