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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콤플렉스

by 담담댄스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지닌 나는 정말 최악이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알쏭달쏭 모바일 세상에서는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등장하고, 그 모두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준을 세워도 극소수의 불행에 신경 쓰는, 아니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내게 패션 디자이너 베라 왕의 아류, 배려왕이라는 말을 건넸을 때,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칭찬인지 맥이는 건지) 배려의 본질은 결과에 있기 때문이다.


오 헨리의 소설 <마녀의 빵>을 보면 매일 자신의 빵집에 들러 하루 묵은 식빵을 사가는 화가에 관심을 보이는 여주인이 등장한다. 가난해 보이는 이 손님에게 호감을 가진 빵집 주인은 어느 날, 연민과 호감이 뒤섞인 오묘한 감정으로 그 빵에 맛있는 버터를 몰래, 잔뜩 발라서 건넨다.

이튿날, 이 손님은 빵집에 들러 극대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데, 이유는 하나. 그 사람은 화가가 아닌 건축가였고, 공모전에 출품할 설계 스케치를 지우개로 지우면 번지기에 마른 식빵을 지우개 대용으로 활용해 왔던 것이다. 버터 때문에 석 달 동안 공들인 설계도가 엉망이 됐고, 여주인은 그 손님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다는 결말이다.


그저 잘해주는 것만으로 배려는 완성되지 않는다. 행동의 파장까지 감안한 배려가 진짜다. 당장의 미안함을 모면하려 건네지 못한 통보, 책임을 회피하고자 내리지 않는 결정,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공수표는 배려의 얼굴을 가졌지만, 뇌와 심장까지 가지지는 못했다.


내일 만나면 이별하겠구나


이별의 징후는 어느 누구보다 당사자가 잘 안다. 식어버린 마음을 고스란히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외롭지 않으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 모진 헤어짐의 단어를 내뱉지 못한다. 권태로이 지속되는 관계는 서로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울고 불고 매달리는 순간, 내게 건넸던 차가운 이별의 말은 한 달만 지나도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진다. 순간의 동정심보다, 비정함이 결국 배려였던 셈이다.



회사에서는 또 어떤가. 남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미안해 혼자 끙끙 싸매다 모든 일을 망쳐버리기 일쑤다. 후배에게 그저 시키기만 하는 선배로 남지 않으려던 사람은 뒤돌아보면 '후배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사람'이 돼 있다. 아뿔싸, 그제서야 일을 맡기는데 빡센 일을 맡기면 또 나를 싫어할까봐 쉬운 일 위주로 맡긴다. 몇 달 후, 자신의 주위에는 '평가에 중요한 기획업무는 자기가 하고, 영양가 없는 오퍼레이션 업무만 후배에게 떠넘기는 사람'이라는 평판만 남는다.


때로는 후배에게 맡긴 일의 결과물이 미덥지 못해 피드백을 전전긍긍한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응, 잘했어.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하네, 나머지는 내가 할게


과로의 구렁텅이로 나를 밀어 넣는 마성의 주문이다. 이윽고 다른 그림 찾기가 아닌, 같은 그림 찾기 수준으로 본인의 초안과 달라진 보고서를 본 후배는 낙담한다.


지가 다할 거면 뭐하러 나를 시키나, 시간 아깝게
그나저나 내가 뭘 잘했다는 거여! 맥이는 건가?


나이스 가이가 배워야 할 것은 결코 다정한 화법이나 화술이 아니다. 일의 목적과 방향성을 정확하게 가이드하고, 결과물에 대해 감정을 빼고 정확하게 피드백하는 기술이다. 요컨대, 다정함보다 정확함이 배려다.


정확해지는 것이 훨씬 어렵다. 상황과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필요하고,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경험과 전문지식도 필요하다. 담백하고도 섬세한 화법도 익혀야 한다. '배려=다정함'이라는 굴레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어쩌면 태만한 나를 감추기 위한 낮은 수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확해지기 위한 의지와 부지런함이 배려의 본질에 가깝다.


때로는 비정하고, 때로는 잔인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담백하게 말한다 해도 사람이기에 충분히 마상을 입을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순간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일도, 사랑도, 상대방을 위한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배려하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취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자존감과는 다른 얘기다. 자존감은 오로지, 오롯이 모자란 것은 모자란 대로, 잘난 것은 잘난 대로 나의 현재를 인정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누구처럼'이 아닌 '나다움'을 만들기 위해 실천하는 모든 행동과 마음가짐만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배려는 나의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타인을 레버리지 삼는 행동이 되기 십상이다. 타인을 도우려는 순수한 선의와 행동까지 배려지, 그 이후로 느껴지는 뿌듯함과 자아도취는 경계해 마땅하다. 쉽게 말해 배려를 이미지 관리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다.


오빤 잘 모르는 다른 사람한테 잘하지 말고 나한테 좀 잘해봐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최고의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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