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에서 아이콘으로
박재범과 GD, 동년배의 두 슈퍼스타를 보면 배울 점이 너무 많다. 나보다 동생들이지만, 몇십 배는 많은 삶의 무게를 짊어진, 그리고 겪어낸, 마침내 이겨낸 사람들은 언제나 선배이자 스승이다.
몇 해 전, 두 슈퍼스타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글을 써두었다. 너무 아웃데이트 돼 이걸 어떡해야 하나 저장해두고만 있었는데, 좀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 꺼낸다. 별다른 의미를 추출해 내지는 못했지만, 영감의 원천이 된 몇 가지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ㅡ 어때 요즘에? 블랙핑크가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데 <APT>를 하고, 제니도 하고, 로제도 하고 GD도 Anderson Paak이랑 뭘 하고, 진짜 아예 Worldwide로. 너도 약간 그런 욕심이 나지 않아?
ㅡ 저는 대중분들이 알 만한 차트나 이런 게 있잖아요. 근데 그런 거는 제가 사실 이뤄본 적이 없어요. 근데 제가 그래도 뭐 한국인들이 흔히 안 나가는 곳들을 나가서 좀 대표로서 프리스타일 랩도 하고, 나름 좋은 평도 받고 이래서 저는 많은 분들이 그걸 몰라줘도 그것만으로도 저는 되게 충분히 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ㅡ 아니, 내가 얘기하는 건 '네가 그들과 비교했을 때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느냐'라고 물어본 게 아니라, 넌 되게 멋있는 너의 길을 걸어왔고 그런데 아티스트로서 그냥 너무 메이저 히트가 아니라 너무 슈퍼 울트라 월드와이드 메이저 울트라 캡숑 히트가 나오니까... '아이돌 말고, 팬덤 있는 사람 말고, 누가 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을 때 '재범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거야 그냥. 그걸 하고 싶지 않다면 상관없지만.
ㅡ 하고 싶지 않은 것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너무 좋죠. 하지만 되게 좋은 게 저는 '막 하잖아요'. 막하면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이 히트일 필요가 없어요.
ㅡ 얘는 꽉 차 있어서 그걸 그렇게 노리지 않는구나
ㅡ 이제는 저는 솔직히 얘기하면 충분한 것 같아요
우문에 현답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노력하여 얻은 성취의 경험은 성공의 경험 못지않게 소중하다. 나의 성취를 인정받았고, 그 인정을 납득할 수 있으니 더는 부러운 것이 없다는 박재범의 저런 태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성숙하달지, 쿨하달지...
삶의 중심을 오롯이 나에게 향하게 두는 자세. 나이가 많다고 대가(大家)인가. 깨달음이 많아야 대가지. 난 대가리에 뭐만 들은 걸까......
위 영상은 아주 유명한 지드래곤의 잡도리(?) 영상이다.
ㅡ 전체적으로 계속 밝아서 욕을 쳐 먹잖아요 저희가. 근데 왜 계속 밝으냐고요.
방송도 이렇겐 안 하잖아요. 저희 콘서트 저희가 돈 주고 저희가 만드는 건데,
돈 주고 오는 사람들이 다른 거 보러 오는 건데 뭔가 나아진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일단 수고하셨습니다
저 대사만 보면 많은 이들이 지디의 싸가지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영상을 보면 지디가 얼마나 참아내면서, 꾹꾹 눌러가며 선별한 언어를 썼는지 알 수 있다. 최정상의 아이돌임에도 오직 VIP만을 위한 단독 콘서트 무대를 가장 중요히 여기는 마음, 오래 합을 맞춰 온 스태프들에게 쓴소리를 해야 하지만, 이내 착잡함에 수고하셨다는 인사로 마무리하는 저 마음을 난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저 나이에 또래라면 겪지 않았을 의사결정에 대한 압박감과 리더십에 대한 부담감이 더 짠해 보인다.
사실 박재범과 지디는 비슷한 듯,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모두 유명 기획사의 2세대 아이돌 최정점에 서 있었던 데뷔 시절을 맞이했지만, 한쪽은 국민적인 지탄을 받고 그룹에서 퇴출돼 다시 밑바닥부터 다지고 올라와 스스로 최정상의 위치를 탈환했고, 다른 한쪽은 멈출 줄 모르는 성공가도를 달리다 슬럼프에 빠져 최근에서야 재기했다.
좀 더 일찍이 실패를 맛본 박재범은 자신을 홀대하고 무시하던 정서를 견뎌내고 극복하며 강인한 멘탈리티를 갖게 됐지만, 상대적으로 성공 일변도의 삶을 걸었던 지디는 ‘욕을 쳐 먹을’만큼 밝았던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억압과 부담, 그에 수반하는 공허함 사이를 메울 무언가를 찾다 결국 놔버렸다.
경험한 적은 없지만,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6만 명의 함성 소리를 듣다 홀로 호텔방에 들어왔을 때의 적막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제대 이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맞이해야 했던 멤버들과 소속사 대표의 탈선. 그룹의 존폐 앞에 부득이하게 선택해야 했던 음악적 방향성의 기로에서 별다른 답을 찾지 못하고 내려놓는 삶을 살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그리고 억까짤 퍼다 샬라샬라하던 수많은 헤이터들을 모티브 삼아, 그 분노와 해탈을 연료로 완벽한 복귀를 알렸다. 이후, 지드래곤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 역시, 당연히도, 너무나도 대가이다.
빅뱅과 2PM은 대형기획사인 YG와 JYP의 부흥을 이끈 2세대 아이돌의 대표다. YG의 노선은 그들의 첫 아티스트인 지누션부터(양군기획 시절 킵식스라는 진짜 1호 가수가 있지만, 이주노의 영턱스클럽과 H.O.T.라는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소리 소문 없이 퇴장 ㅠㅠ) 랩과 힙합을 표방했고, 원타임을 거쳐 빅뱅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특히 지드래곤은 그룹의 리더이자 데뷔앨범부터 작곡에 참여해 빅뱅의 거의 모든 음원을 만든 프로듀서로서 역량을 드러냈다. 힙합 등 블랙뮤직 기반에 시기적으로 유행하던 댄스, 일렉트로팝, 하우스, 락, R&B 등과 콜라보하며 빅뱅과 지드래곤의 음악적 컬러가 완성됐다.
데뷔 때 Maroon5의 <This Love>를 샘플링한 동명의 솔로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꼬마룰라 때의 커버댄스 추던 꼬마와 신인 아티스트로서의 간극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데뷔 때 부른 <This Love>보다 유스케 출연 당시, 앉아서 부른 버전을 더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절정의 폼에 이른 뮤지션의 즉흥적인 공연이었기에 좀 더 생생한 느낌이 나서 그럴까.
빅뱅의 인기와 함께, GD는 이 시대와 세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빅뱅뿐만 아니라 솔로로, 유닛으로, 심지어 무한도전까지!!! 활발한 창작과 무대활동을 이어가며 정점으로 치닫는다.
내게 빅뱅 하면 떠오르는 노래는 <FANTASTIC BABY>와 <뱅뱅뱅>이다. (비슷한 결의 노래로 <맙소사>도 있지만 이건 빅뱅의 음원은 아니므로) <거짓말>과 <마지막 인사>를 꼽는 이도 있지만, 혹시나 빅뱅이 10년 후에 그들의 대표곡으로 어떤 곡을 부를지 생각해 보면 <FANTASTIC BABY>와 <뱅뱅뱅>이 선택받지 않을까.
일렉트로닉 기반의 강력한 사운드와 베이스, GD&Top의 파워풀한 랩과 대성&태양의 시원시원한 보컬까지, 그리고 중간마다 또는 마지막에 변주된 리듬과 사운드를 통해 군무 속에서도 멤버들의 개성을 강조하는 특유의 곡 전개까지 들을 때마다 신나고 지금도 세련됐다.
GD가 2차 함수처럼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는 동안 박재범의 영향력은 냉정히 그 정도는 못됐다. 빅뱅보다 2년 늦은 데뷔, 본인의 아이덴티티가 없었던 '아이돌스러운' 음악이었기에 우리가 지금 열광하는 박재범 특유의 개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참고로 빅뱅과 2PM은 YG와 JYP 양 기획사의 관례처럼 이어지던 연습생 대결 때 맞붙은 상대였다고 한다.)
데뷔 싱글 <10점 만점에 10점>에 이어 <Again & Again>, <니가 밉다>의 흥행으로 스타덤에 올라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사실 아이돌로서의 활동은 고작 1년에 그쳤다.
내가 기억하는 이 시절의 박재범은 리더였고, 한국어가 서툴렀다는 것, 노래와 춤, 그중에서도 특히 아크로바틱을 잘했다는 것 정도다. 오히려 2PM 탈퇴 후에 원래의 박재범의 취향은 힙합과 비보잉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보다 훨씬 박재범의 팬인 와이프가 솔로활동 시절을 보여줘 알게 됐는데 특유의 성실함으로 아이돌에서 힙합 뮤지션으로 훌륭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아마 Nothin' on you와 JOAH 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Idol을 넘어 Icon으로, 두 뮤지션은 시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둘은 경쟁관계가 아니기에 누가 누굴 따라잡았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지만, 이 시기 박재범의 성장세는 압도적이었고, 퍼포먼스는 독보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무장한 박재범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허슬러(hustler)' 말고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JOAH>를 시작으로 대중들에게 솔로 힙합 & R&B 뮤지션으로 인지도를 쌓아가면서 AOMG와 H1GHR MUSIC이라는 두 레이블을 이끄는 수장이 됐다. 힙합씬의 신예를 꾸준히 발굴하고 양질의 음악을 만들어가며 씬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솔로 활동, 컬래버레이션, 피처링 등 가리지 않고 본인의 힙합에 대한 애정과 재능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쏟아낸다. 이 시기 그의 퍼포먼스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방대한 작업량이다. 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AOMG, H1GHR 소속 아티스트와 음악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아시아 뮤지션 최초로 Jay-Z가 만든 레이블 락네이션에 영입되기도 했으며, 사업수완도 좋아 원소주는 출시하자마자 난리난리 생난리를 겪으면서 겨우 구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지금은 열기가 많이 식었다) 그의 이러한 성과는 밈으로도 화제인 '월클라인'(BTS, 봉준호, 손흥민, Jay Park, Let's go!)을 납득시키는 방증이다.
<댄싱9>,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등을 통해 댄싱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쇼미더머니> 프로듀서 내지는 피처링으로 거의 매년 참석해 전체 씬을 키우는 데 본인의 역량을 아낌없이 쏟고 있다. 쇼미11 시즌에 함께 프로듀서로 나선 슬롬과 함께 경연곡들을 단체곡으로 리믹스해 팔로알토 같은 OG부터 NSW Yoon 같은 신예까지 참여시킨 것은 힙합에 대한 애정에 특유의 추진력이 더해진 결과다. 그리고 오랜만에 재개하는 쇼미 12에서도 프로듀서로 나선다고 한다.
대학 축제는 늘 섭외 1순위. 값비싼 출연료를 모두 해당대학 장학금으로 기부하는 데다 학생들을 열광하게 할 세트리스트가 넘쳐나니 말이다. 이 모든 바탕에는 쿨하면서도 선한 천성이 있다.
지디는 이 시기 이미 'Idol's Idol'이자 대중문화를 넘어 패션시장까지, 문화산업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아직도 샤넬의 뮤즈라면 지디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본인이 설립한 '피스마이너스원'이라는 패션브랜드도 있는데, 어휴 입고 싶은데 몸과 돈이 안된다.
지디는 2015년 저 유명한 빅뱅의 <MADE> 시리즈를 내놓는다. 빅뱅의 결과물이지만 지디가 내놓는다고 말한 이유는 <LOSER>를 제외하고 전곡 작곡에 참여했기 때문이다.(<LOSER>도 작사에는 참여했다.) <MADE>는 정말 2015년 한 해를 '빅뱅이 다해먹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영리하다고 해야 할까, 무자비하다고 해야 할까. 오직 빅뱅이기에 가능했던 따로 또 같이 발매 전략은 빅뱅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이후 지디는 2017년 솔로 앨범, 2018년 빅뱅 싱글 <꽃길>을 내고 본인에게도, 멤버들에게도 정말 다사다난한 시간을 지난다.
2022년, 빅뱅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발매한 <봄여름가을겨울>은 내가 기대했던 빅뱅이나 지드래곤의 바이브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 노래 자체로만 보자면 탁월한 장르였고, 적절한 메시지였다. 이룰 것은 다 이루고, 겪을 풍파는 다 겪은 멤버들이 더 이상 세상사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2010년대 최고의 뮤지션을 꼽자면 개인적으로는 빅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삶과 인생의 거대담론을 읊조리는 멤버 한 명마다 나름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한 명 한 명의 굴곡진 개인사 때문이리라. 명백한 잘못도 있고, 안타까운 사정들도 있지만 어쩌면 수준 높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련이 필요충분조건인 건가 싶은 마음마저 든다.
음악산업 전반적으로도 여전히 트렌디하고 노래 잘 만드는 지코나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가수로 훗날(어쩌면 지금도) 평가받을 수 있는 빌보드 1위 가수, BTS가 전체 시장을 키우고 K-POP을 세계시장에 안착시켰지만, 그 시작점을 빅뱅이라고 보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시기, '허슬러' 박재범을 '열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지디는 '예술혼'이 타버린 후의 '공허함'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무대 위 함성이 끝났을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헛헛한 감정을 유독 많은 노래에 담고 있다. 슈퍼스타에게 있어 공허하다는 감정은 필연인가 싶지만 박재범은 그것을 더욱 에너지로 발산하고 분출하는 방식으로, 권지용은 내면으로 삭이고 숙고하면서 예술의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두 아티스트 간 의외의 공통점으로 오늘의 길기만 하고 기승전결 팔아먹은 글의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두 뮤지션 모두 아이유와의 컬래보레이션으로 모두 음원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여윽시 국힙원탑은 아이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