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hesitation의 정신
추석 연휴, 모든 방송사를 통틀어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프로그램을 꼽자면? 추석 당일 방영된 광복 80주년 KBS 대기획 <조용필 - 이 순간을 영원히>로 무려 최고 시청률 18.2%, 전국 15.7%를 기록했다. 이번 공연을 본방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배대웅 작가님의 추천을 받아 아주 큰 마음을 먹고 바로 다시보기 결제 끊어버렸다. (비웃지 마시길. 내겐 정말정말 큰 소비다...)
이번 기획의 모티브라 할 수 있는 '광복 80주년'은 그냥 의미를 갖다 붙인 것이겠지만, 나는 광복 후 80년 간 우리나라 대중음악사(史)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말하자면 늘 서태지라 했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가왕, 조용필이라 답할 것이다. 서태지가 K-POP의 선구자라면, 조용필은 당대의 대중음악 최전선에서 길을 이끌고, 섞여 들었던 한국 대중음악사 그 자체다.
이 공연은 왜 조용필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뮤지션인지 보여주고 증명한 2시간 30분 간의 대답이자 대담이다.
<조용필 - 이 순간을 영원히> Set List
1. 미지의 세계 (1985)
2. 못찾겠다 꾀꼬리 (1982)
3. 자존심 (1982)
4. 그대여 (1985)
5. 추억속의 재회 (1990)
6. 창밖의 여자 (1980)
7. 촛불 (1980)
8. 어제 오늘 그리고 (1985)
9. 단발머리 (1980)
10. 고추잠자리 (1981)
11. 허공 (1985)
12. 그 겨울의 찻집 (1985)
13. Q (1989)
14. 돌아와요 부산항에 (1975)
15. 잊혀진 사랑 (1980)
16. 그래도 돼 (2024)
17. 꿈 (1991)
18.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1987)
19. 바람의 노래 (1997)
20. 태양의 눈 (2003)
-------- (KBS교향악단 협연) --------
친구여 (1983)
슬픈 베아트리체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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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시아의 불꽃 (1985)
22. 나는 너 좋아 (1983)
23. 찰나 (2024)
24. 청춘시대 (1987)
25. 모나리자 (1988)
-------- (앵콜) --------
26. 킬리만자로의 표범 (1985)
27. Bounce (2013)
28. 여행을 떠나요 (1985)
자, 공연 현장에서는 28곡, KBS교향악단과의 협연까지 하면 무려 30곡의 종합선물세트(또 나왔네 이 비유;;;)다. 우리 같은 범부들은 코인노래방 가서 다섯 곡만 불러도 목소리가 맛이 가는데...... 한국전쟁 발발했을 때 태어난 노구(라고 불러도 될지요 송구합니다)를 이끌고, 무려 2시간이 넘는 공연동안 보여준 가창력 그리고 체력은 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피부는 또 어쩔)
이번 공연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많지는 않았지만 곡 중간중간 관객들과 호흡하며 건네는 토크였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왜 가왕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공식적인 인터뷰에서는 늘 품위 있고 겸손하지만, 공연에서 관객들에게 건네는 언사는 결이 다르게도 위트 있고 다정하다. 정말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허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임종을, 그를 영원한 '오빠'로 추앙하는 단발머리 소녀들과 함께한다면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이자 선물이지 않을까. 물론 이런 얘기를 꺼내기에 그는 아직 창창하다.
그 위트를 실제로 풀어놓자면 세대 보정이 필요하기에 굳이 꺼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번 여름 무더위가 너무 심해서 <그 겨울의 찻집>을 부르겠다는 식이다.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고 깊어지는 미성은 한 장르의 음악에 얽매이지 않도록 받은 선물이자, 모든 장르의 음악에 어울리는 치트키 같다. 목소리도 나이만큼 늙는다. 그래서 노래를 안하면 늙는 목소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놔야 하기에, 이번 공연을 조금이라도 더 잘하고 싶어서, 만 75세의 아티스트는 3일에 한 번 꼴로 한 달 반 가까이 밴드와 함께 실제 공연처럼 전곡을 연습했다는 후문이다. 합주가 없는 날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개인 연습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번 공연 세트리스트만 봐도 1975년 발매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트로트이고, 그의 음악적 근간인 밴드사운드(락)에 기반한 수많은 히트송들, 그리고 일렉트로닉을 가미한 2013년 발매곡 <Bounce>, 모던 록의 음률에 실어낸 위로의 말결 <그래도 돼>(2024)까지. 시대불문, 세대불문, 장르불문의 목소리는 타고난 것이 아님에 더욱 존경스럽다.
내가 가왕에게 가장 놀랐던 때는 바로 2023년 발매했던 정규 20집(2024년 발매)의 선공개곡 <Feeling of you>를 처음 들었을, 아니 만났을 때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기어이 나를 이 노래로 데려다주었다. 콜드플레이(Coldplay)의 노래인가, 펀(Fun)의 노래인가, 아이브(Ive)의 노래인가. 이런 비유가 무색하리만큼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이 노래는 조용필의 것이었다.
조용필은 한참 어린 세대와의 경쟁 아니 조화에 주저함이 없다. 한국말로는 주저함의 반대말을 떠올리지 못해 부득이하게 No hesitation으로밖에 그를 정의할 수 없다.
충분히 스스로 훌륭한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조용필은 김이나를 택했다. 덕분에 그의 메시지는 꼰대의 라떼가 아닌, 어린 세대를 이해하는 선구자의 위로와 안부로 와닿을 수 있었다. 앞서간 이가 조심스레 건네는 한 마디,
네 기분은 어때? 그 무엇보다 제일 중요해, 너의 마음이
이토록 다정한 인사라니! 무려 가왕이 건네는 안부인사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찾아볼 순 없지만, 짐작컨대 김이나가 이 노래 제목을 Feeling of you로 붙인 것도 특유의 위트가 발휘된 결과가 아닐까. 너의 느낌, (현재진행형의) 너의 (조용)필링. 창작자의 이런 의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거장의 안목이자 No hesitation 정신의 일환일 것이다.
뮤직비디오 역시 마스터피스다. 형형색색의 감각적인 3D 모션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는 지금 시대와 세대의 뮤지션들도 쉽게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유명 배우나 뮤지션 본인이 등장하지 않는 선택부터, 가사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재해석할 수 있게끔 부여한 스토리, 민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캐릭터 등 치밀함이 숨어있다. 대표 캐릭터인 호랑이엔 색채를 부여해 진지하되 무겁지 않고, 쾌활하되 가볍지 않은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기민하게 드러냈다. 그는 거장의 기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언제든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쾌한 소년이다.
뮤비의 서사를 요약하자면, 꿈을 함께한 친구들, 잠시의 헤어짐, 다시 만나고 깨달은 참행복, 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진 더 넓은 무지개 길로 마무리된다. 다양성을 리스펙하는 시대의 아이콘, 무지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70대의 아티스트는 어쩌면 그 어떤 젊은이들보다 젊음에 열려있는 것만 같다.
'오빠'라는 말을 가려 써야 할 요즘이지만, 조용필에게만은 오빠라 부르는 것을 모든 이들이 용인해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 허락해 주었으면 한다.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소녀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20대의 목소리를 간직하기 위해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친, 우리시대 가장 위대한 뮤지션을 위해서라도.
*표지 이미지_ 조용필 <Feeling of you> M/V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