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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by 담담댄스
본 글에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추후 이 영화를 보실 계획이 있다면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세요.


결혼하고 많은 것을 새삼 깨닫게 됐지만, 그중 유난히 인상적인 것은 바로 '엄마와 딸'의 관계다. 나는 아들로서 역할하고 기능하다 보니, 그리고 관계성을 보고 배울 누이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와 딸이 어떤 관계인지, 그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1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엄마와 딸이 어떤 관계인지, 드디어 와이프와 장모님을 보며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하며, 스케일이 컸다. 정말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나 싶을 만큼 매섭게 싸우는데, 대개 장모님이 물러서지만 아주 가끔씩 폭발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대개 아들은 엄마와 싸울 일이 잘 없다. 말 자체를 안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와 딸은 정말 친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시시때때로 주고받지만, 그만큼 언쟁의 불씨도 상존해 있다. 왜 이러는 것일까. 진정 엄마와 딸의 관계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 초반 40분의 혼돈과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지만 조금 더 참을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의 인내심이 수반된 선택은 꽤나 좋은 시간으로 보상받았다.


장문의 줄거리를 썼다 지워 버렸다. 영상으로 봐도 어려웠는데, 글로 봐서는 더더욱 불가해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줄거리는 나무위키유튜브 로 보시길) 그래서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과 그에 대한 감상을 전하는 식으로 글을 써보려 한다. 본문의 이해를 위해 간단한 인물 설명만 덧붙여 본다. (출처는 나무위키)


에블린 (양자경 扮)
홍콩의 한 가정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자랐고 배우를 꿈꿨지만, 초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성장한 후 연인이 된 웨이먼드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웨이먼드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빨래방을 운영하고 외동딸 조이가 태어나 행복해했으나, 답답한 남편과 엇나가는 딸, 세무 이슈 등 이민 생활에 차츰 지쳐간다.


조이 / 조부 투파키 (스테파니 수 扮)
에블린과 웨이먼드의 딸. 어려서는 엄마 에블린과 친했지만, 대학을 그만두더니 자신이 레즈비언이라 밝히고 연인 베키와 나가 살게 된 후로는 엄마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베키를 마지못해 상대하는 엄마에게 제대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엄마가 외할아버지에게 베키를 자신의 여자친구가 아닌 '친구'라고 소개하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웨이먼드 (키호이콴 扮)
에블린의 남편. 어린 시절부터 에블린과 친구 사이로 나중에는 연인이 되어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결혼했다. 처음에는 행복하게 살았지만, 에블린이 고달픈 이민 생활에 지쳐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자 둘의 결혼 생활은 삐걱거린다. 에블린과 진중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방법으로 이혼 서류를 준비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왼쪽부터) 조이, 에블린, 웨이먼드 순 (출처: 네이버 영화)


#1. 엄마와 딸이 그렇게까지 싸우는 이유


에블린 아버지: 내 세계에서 넌 딸애를 무너질 때까지 심하게 몰아붙였어. 네가 조부 투바키를 만든 거야.

(중략)

조부 투바키: 당신을 어머니로 둔 기쁨과 괴로움도 알지.
에블린: 그럼 알 거 아냐. 걔를 위해선 옳은 일만 할 거란 거, 너를 위해서.
조부 투바키: '옳음'은 두려워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좁은 상자야. 그 상자에 갇히는 기분은 내가 알지.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여자친구'를 그저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는 에블린을 회상하는 조부 투바키(조이))

에블린: 아버지 때문이었지. 세대가 다르시잖아.
조부 투바키: 마음 내려놔. 베이글이 세상의 섭리를 보여줄 테니까.
에블린: 안 돼, 조이랑 돌아갈 거야. 내 가족에게로, 내 삶으로. 행복한 삶.
조부 투바키: 좋아, 어디 해봐. 모든 걸 경험하면서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당신이 보고 다른 길도 있다고 납득시켜 줬으면 했어. 이 베이글을 만든 이유가 뭔지 알아? 날 파괴하려던 거지.


이 영화를 보고 '엄마와 딸'을 떠올린 것은 모녀지간을 설명하기 위해 '평행우주(멀티버스)라는 세계관까지 끌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경탄 때문이다.


영화 속 평행우주는 엄마와 딸의 복잡다단한 관계성과 함께, 각자의 입장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등장한 장치다. 에블린은 다른 우주(알파버스)에서 우리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자신보다 더 큰 잠재력을 보인 딸을 몰아붙였고, 그 결과 조이는 정신세계가 파괴될 지경에 이르러 평행우주 최악의 빌런, 조부 투바키로 흑화하고야 만다.


조부 투바키는 모든 평행우주를 넘나들며(a.k.a. 버스 점프) 그곳마다의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 한다. 조이가 엄마를 얼마나 증오하게 됐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엄마를 향한 복수의 마지막으로 조부 투바키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선택을 한다. 그건 에블린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임을 알기 때문. 조부 투바키이자 조이가 스스로를 파괴하고자 선택한 방법은 낙관을 부정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었다.


위 대화 속 베이글은 허무를 상징한다. 조이는 베이글이 만들어낸 허무의 블랙홀로 빠져들고픈 강렬한 욕망을 드러내고, 에블린을 조이를 베이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막아선다. 여기서 에블린은 이마에 제3의 눈, 구글리 아이(googly eye)를 붙이는데 베이글과 구글리 아이는 정확히 반전되는 이미지. 허무를 뜻하는 베이글의 대항마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구글리 아이인 것이다.


에블린과 조부 투바키, 아니 조이의 마지막 결투씬은 영화 전반에 걸친 액션씬 중 가장 스펙터클하고 화려하게 표현될 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까지 베이글 안으로 들어가려 사력을 다해 싸우려는 조이를 맞아, 에블린은 영춘권의 준비자세를 취하는 듯싶더니 이내 곧 껴안을 듯한 자세와 표정으로 돌변한다. 진정으로 딸을 구하는 방법은 사랑, 그리고 진심임을 깨달은 것이다.


에블린: (아버지에게) 제 딸은 고집불통이고 엉망이에요, 제 엄마랑 똑같이. 이제야 깨닫지만 엉망이라도 괜찮아요. 얘한테도 저처럼 그 부족함을 메워줄 다정하고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사람을 우주가 보내줄 테니까요. 아버지, 얘는 베키예요. 조이의 '여자친구'죠.

(중략)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어디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해도 난 너(조이)와 함께 있고 싶어.


엄마와 딸의 관계는 하나의 우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논리는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감정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이 폭발하고야 마는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삶을 끌어와야 하는 것.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깨달은 바다.



#2. 최악의 에블린이 전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이유

에블린: 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웨이먼드: 그러니까, 에블린을 수천 명 봤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없었어. 이루지 못한 목표와 버린 꿈이 너무 많아. 최악의 에블린으로 살고 있는 거야.

에블린: 내가 왜 최악이야?

웨이먼드: 모르겠어? 당신이 실패의 길을 택했기에 다른 에블린들이 성공한 거야.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


나는 너를 선택했어. 왜냐면 네가 최악이라서


라고 아무 말이나 싸지른다면 귀싸대기를 올려붙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등장하는 평행우주는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생성된다. 즉,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을 했을 때, 헤어질 때 각각의 선택에 따라 두 가지 우주가 생겨나는 식이다. 모든 선택의 경우를 n이라 한다면, 2^n만큼의 평행우주가 있는 셈이다.


평행우주마다 존재하는 '나' 중에서 온 우주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선택만 일삼아 가장 구린 현실을 사는 나다. 무엇이든 실패한 사람, 그래서 아무런 기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모든 가능성을 경험한 조부 투바키는 허무주의에 빠져 버린 데 반해, 후회 가득한 삶을 살았던 에블린이야 말로 삶을 낙관할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


나는 못하는 것이 참 많다. 그럴 때마다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게 됐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도 실패의 결과보다 도전과 성공의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3. 지금의 삶을 후회할 필요가 없는 이유


에블린: 내 한심한 남편. 보나 마나 일 키우고 있겠지.
웨이먼드: 다 괜찮아질 거야. 진짜 마지막으로 일주일 더 준대.
에블린: 어떻게?
웨이먼드: 그냥 얘기만 했어.


엄마와 딸의 싸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에블린의 남편이자 조이의 아빠, 웨이먼드다.


아내의 눈에는 그저 무능하고 한심하게 보였겠지만, 사실 웨이먼드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소심한 성정 탓에 현실과 직면하며 분투하는 에블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이 작품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이 바로 웨이먼드다.


웨이먼드: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지.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Be kind)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뭔가 혼란스러울 땐.


다정함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에블린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삶의 권태에서, 조부 투바키와의 전쟁에서 웨이먼드의 다정함을 통찰하고 모두 극복해 냈다. 이처럼 다정함도 유능함의 증거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것을, 세상 다정한 이들이 깨닫기 바란다.



한편, 극 중 에블린은 영화배우로 유명세를 누리며 사는 삶이 있는 우주를 가장 동경했다. 그 우주는 웨이먼드와의 결혼을 포기한 선택의 결괏값이었다. 그곳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재회한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웨이먼드: 다른 생에선 당신과 함께 빨래방도 하고, 세금도 내며 살고 싶어


우리가 지겨워하는 지금의 삶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부러워했던 삶에서 그리워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가지 않은 길을 후회하기보다 내가 선택한 길을 꽃길로 만드는 삶. 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이런 것들을 배웠다.






장을 보는 와중에도 와이프는 여지없이 따져 묻는다.


아니, 도대체 우리 엄마는 왜 그러는지 몰라


투덜대는 와중에 과자를 하나 집어드는 아내.


어? 이거 엄마가 좋아하는 거야


그랬구나. 수시로 버스 점프를 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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