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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진심어린 목소리로 가요계를 섭렵했던*

변진섭의 노래들

by 담담댄스
지난 주말, <놀면 뭐하니> 서울가요제에서 오랜만에 변진섭의 <숙녀에게> 무대를 보고 이 글을 다시 꺼내 봅니다. 변진섭이 환갑이라니…… 여러가지 이유로 믿기지 않는 무대였습니다.



발라드라는 장르. 그 이름뿐만 아니라 무드까지, 오롯이 트로트를 대신하는 다분히 한국적인 대중음악이 아닐까 싶다. 유재하를 시작으로, 이문세에서 꽃을 피운 발라드는 변진섭이라는 역대급 신인의 등장으로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데뷔앨범과 2집의 폭발적인 히트, 상대적으로 아쉬웠던 3집 이후의 행보 탓인지 요즘 세대는 그를 잘 모르거나 7080 콘서트에 나오는 왕년의 스타쯤으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진섭은 데뷔앨범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가수다.


변진섭에 대한 내 기억의 시작으로 거슬러가자면 <희망사항>(1989)이 떠오른다.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작사, 작곡한 곡인데 이 노래로 가요톱텐 골든컵(5주 연속 1위)을 수상했던 기억이 난다. 무척이지 시대감수성 떨어지는, 전근대적인 가사로 점철됐지만 마지막에 노영심의 툭 던지는 두 소절의 반전이 요즘에도 어울리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이 노래를 최근에 들었을 때 엔딩에 나오는 노영심의 피아노 반주가 어딘지 모르게 조지 거쉰의 <Rhapsody in Blue>의 메인 테마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그랬다는 점도 재밌는 포인트다.



변진섭은 우리나라에서 발라드라는 장르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발라드 계보에서 상당한 지위와 지분을 갖고 있는 보컬리스트다. 물론, 지금 들어도 함없이, 심 어린 목소리로 가요계를 렵했던 그 노래들이 참 좋다.






1. 홀로 된다는 것 (작사 지예 / 작곡 하광훈, 1988)



변진섭 하면 이 노래를 빼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노래는 레전드를 쓴 변진섭과 하광훈 콤비의 신호탄이자, 변진섭을 국내 최고 가수의 반열에 올린 데뷔앨범의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가 왜 인기가 있었을까 반추해 보면 다분히 '뽕끼'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유재하와 이영훈이 클래식 기반의 발라드를 만들었다면, 하광훈은 한국 특유의 정서를 건드리는 멜로디 라인을 발라드에 접목시켰다.


작곡가 하광훈의 표현을 빌자면, 이 노래는 이미 첫 소절에서 성패가 결정났다고 한다.


슬픈 노래를 절대 슬프게 부르지 않아요.
이 노래 첫 소절이 '아주 덤덤한'인데,
정말 덤덤하게 불러요. 감정을 극대화시키지 않아요.
대가들의 공통점은 70~80점으로 쭉 하는데
듣는 사람들이 가는 거예요.

이래야 노래가 오래 가요.



2.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작사/작곡 지근식, 1988)



이문세에게 이영훈 같은 프로듀서가 변진섭에게는 지근식이다. 변진섭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명곡들은 지근식에게서 나왔고, 지근식 역시 변진섭 이외의 가수와 많은 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광훈과의 마이너 콤비네이션이 그를 슈퍼스타 반열에 오르게 했다면, 지근식과의 메이저 콤비네이션이야말로 변진섭의 음악적 정체성을 정립시켰다.


그중에 이 노래가 가장 좋았다. 어떤 면에서는 윤종신의 <환생>처럼 샤랄라한 분위기의 ‘두왑’ 같다가도, 이승철의 <잠도 오지 않는 밤에>처럼 ‘블루지’하다. 무엇보다 변진섭은 따뜻한 음색을 지녔다. 이 목소리를 가장 잘 활용한 프로듀서가 지근식이다.



3. 너에게로 또 다시 (작사 박주연 / 작곡 하광훈, 1989)



변진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노래를 딱 한 곡만 꼽으라면 이 노래여야 하지 않을까? 유명한 노래라고 해서 이 노래를 이번 리스트에서 뺄 수는 없을 것 같다.


<홀로 된다는 것>에서의 뽕끼를 좀 더 덜어내고, 완연한 마이너 발라드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가 되었다. 2집의 타이틀곡으로, 이 노래와 앨범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大작사가 박주연의 등장이다. 신인 작사가에게 최고 인기가수의 타이틀곡을 포함해 무려 네 곡의 작사를 맡겼다는 점도 놀랍지만, 변진섭과 하광훈 역시 이 재능을 알아보고 노랫말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안목이 높다 하겠다.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짙은 어둠에서 서성거렸나
내 마음을 닫아둔 채로 헤매이다 흘러간 시간


이별 후, 절절한 심정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녀의 재능이 놀랍기만 하다. 변진섭 특유의 덤덤한 창법과 어우러져 슬픔의 심연을 보여주는 노래다.



4. 그대 내게 다시 (작사 노영심 / 작곡 김형석, 1992)



이 노래는 원곡자가 <풍선>을 불렀던 다섯손가락 출신의 보컬리스트, 임형순이다. 당시에는 인기를 많이 얻지 못했는데, 변진섭이 5집의 타이틀곡으로 삼으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나는 이 노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이메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중학교 2학년 때, 계정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 이 노래 뭐지?' 신기하게 내 귀는 김형석이 만든 노래에 유독 반응하나 보다. 그래서 키보드를 영어 입력 상태로 두고 '그대내게'를 쳤더니 'rmeosorp'가 되었다.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아 r과 m 사이에 o를 붙여 romeosorp를 계정명으로 만들었고, 20년이 지나 만든 내 브런치 계정명 역시 romeosorp다. (안물안궁 TMI 죄송합니다)


원곡과 수많은 리메이크, 커버 버전이 있지만, 이 노래를 변진섭만큼 애절하게 부른 가수는 단언컨대 없다. 가장 좋아하는 변진섭 노래를 꼽으라면 두 손가락 안에 이 노래를 꼽고 싶다.






내가 대중가요에 워낙 관심이 많은 것을 똑똑한 유튜브 알고리즘이 알아버렸는지, SBS에서 만든 <아카이브-K>라는 채널을 소개해 주었다. 대중음악을 장르별로, 통시적으로 조망하면서 수많은 비화와 조망받아야 할 인물들을 짚어주는 이 콘텐츠에서 글쓰기의 영감을 많이 얻었다.


변진섭의 노래에 흠뻑 빠지게 된 것도 이 채널 덕분이다. 성대도 늙는다던데, 둘리가 그러하듯 둘리를 닮은 변진섭의 목소리는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고 깊어만 진다. 나는 한동안 변진섭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는 가을을 보낼 것만 같다.


원래 이 콘텐츠는 내 첫 손가락, 최애곡 <로라>를 소개하려 기획했다. 하지만 이 노래가 표절곡임을 알게 됐고, 본문에선 뺐다. 하지만 이 노래가 내 최애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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