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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정치인이 있습니까

라디오PD 시험후기 2편

by 담담댄스
댓글이 10개까지 차지도 않았지만 이건 일종의 앵콜요청 같은 거였어요. 이미 아티스트도, 세션들도, 심지어 객석에 있는 팬들도 미리 앵콜곡 세트리스트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요.

그치만 고맙습니다. 특히 @잡귀채신 작가님(세상에! 채널 아이디가 @jabche 군여...... 체는 작가님의 도전적인 성향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체 게바라의 '체' 아닐는지요) 앵콜요청도 모자라 기웃기웃까지 시전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회사생활은 따분함과 즐거움의 핑퐁이었다. 따분해질라치면 재밌는 일이 생기고, 또다시 지쳐가고...... 그래도 첫 직장이 꽤나 괜찮았던 모양이다. 27살에 입사해서 5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회사생활이라는 것에 적응해 가며 라디오PD에 대한 꿈은 점점 옅어져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에서 맡은 일 중에 매일 오후 3시, 임직원들의 신청곡과 사연을 받아 전사에 틀어주는 PD 겸 DJ로도 활약하기도 했다.


이만하면 됐지 뭐. 돈도 많이 주고 이렇게라도 라디오PD 할 수 있으니 일도 괜찮은 것 같애 ㅋㅋ


이대로 월급쟁이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나 싶을 때, 작은 사건이 터졌다. 일은 적고 팀원들과의 관계는 돈독해져가는 그 시점에서 정확히, 회사는 벌어오는 돈은 적고(오히려 쓰는 팀) 맨날 노는 팀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세한 얘기는 아래 게시글을 봐주면 좋겠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조직개편과 원치 않았던 인사발령으로 회사생활은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결국 서른둘의 나이에 다시 한번, 생애 마지막으로 라디오PD가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안 되면 그냥 내 팔자에 PD는 없는 거라고 단념하자며 주말에만 하는 라디오PD 스터디를 구하고 퇴근 이후에는 기획안과 프로그램 모니터링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곳만 탈출할 수 있다면, 심지어 그곳이 방송국이라면 몸이 부서져도 좋아


이런 심정으로 라디오PD를 준비했고, 결국 퇴사가 먼저였다. 운이 좋게 방송계와 가까운 엔터테인먼트(음반유통/연예기획) 회사로 이직을 했고, 라디오PD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내 나이 서른둘의 일이었다.


지금이야 서른둘이면 완전 애긔애긔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PD 준비하는 사람 중에 나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는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낮추고 줄였다. 아, 서른둘......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영혼 뭐 얼마 값나가지도 않는 거 팔 수도 있는데...... 아무튼 새 회사에서 만든 보고서와 방송국 채용공고 페이지를 도리도리 고개 돌려가며 확인하는 삶이 시작됐다.


입사 5개월 만이던가.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기회를 앗아간 정치가 이번에는 기회를 준 셈이었다.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정권에 대한 반발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다시 한번 방송국 PD들을 비롯한 핵심인력들이 파업에 돌입하며 방송 제작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라디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결국 방송국에서는 특별채용으로 경력 PD들을 채용하기로 했다. 거기엔 라디오PD도 포함이었다.


공고를 보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한 것은 지원자격에 쓰여있는 문구 때문이었다.


PD 경력이 없어도, 문화마케팅 종사자라면 지원 가능



똥도 약에 쓴다고, 첫 직장에서의 똥같은 경력, 당시 현 직장에서의 고되고 호된 직장살이 모두 지원에 큰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내 첫 직장은 유명 뮤지션의 공연을 많이 하는 곳이었고, 현 직장은 대놓고 음원/음반을 유통하고 가수를 키우는 곳이었으니...... 경력인 듯 경력 아닌 경력 같은 PD 무경력자인 내게 마지막 기회라고 신이 속삭여주는 것만 같았다.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라디오PD만 시켜준다면 박정희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구국의 영웅이 될 수도 있었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최소 30년은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만큼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치가 준 기회를 정치적으로 잘 활용해 보자 다짐했다. 5년 간의 회사생활 짬이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서류 통과부터 조짐이 좋았다. 심지어 빠른 충원을 위해 작문시험과 1차 면접시험을 구분해 뽑았던 전례를 무시하고 하루에 몰아서 본다고 했다. 즉, 작문의 비중을 높게 보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경력을 좀 더 중시하겠다는 실증주의적 사고로 이번 채용에 나선다는 의도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작문 주제도 무척이나 성의 없는 '라디오'였다.


OMG! 라디오PD 시험인데, 라디오로는 작문을 한 편도 써본 적이 없네?


하지만 작문 따윈 통과점에 지나지 않아. 아마 기억으로는 버스에서 기사 아저씨가 틀어주는 라디오를 즐겁게 들으며 이동하는 승객들 사이, 귀에 이어폰을 끼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라디오를 소음처럼 인식하는 한 명의 학생. 이 학생을 통해 라디오는 BGM인가, 몰취향의 상징이 되어버렸나를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얼버무리며 마무리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결정적이지는 않았을 거다.


1차 면접에서의 전략은 '쓸모'를 어필하는 거였다. 당연히 어떤 프로그램을 맡아보고 싶냐는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회심의 아이디어로 '새벽 3시 프로그램'이라고 답했다.


어차피 되기만 하면 밤 10시 식영이형과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할 수 있을 거니까, 일단 합격만 하자


는 심정으로 방송국에서 소위 '버린 시간'대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이를 통해 라디오가 사운드 매체로서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어필하고자 했다. 쉽게 말해 좀 튀려고 했다.


담담댄스 님, 축하드립니다. 1차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살면서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런 선택받은 소수가 될 수 있겠구나. 설렘은 잠시 넣어두고 최종면접을 준비하는 데 온 마음을 다했다. 특히, 음악보다는 시사 상식 위주로 준비했다. 방송국이 PD를 뽑는 이유는 정치적 이유에 따른 보결인원을 선발하는 것이었으니까. 바로 현장에 투입된다면 시사 프로그램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드디어 최종면접 날, 휴가를 내고 오랜만에 정성껏 다려둔 셔츠와 넥타이, 수트를 착용했다. 모두가 진심으로 내가 라디오PD가 되길 바랐던 것 같다. 엄마, 여자친구, 베프들, 심지어 당시 회사 동료들까지;;;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으니 방송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ㅡ 자기소개해 보세요

ㅡ 안녕하세요, 1025번 지원자 담담입니다. 소리는 하늘에서 빛으로 바뀌어 제게 닿았습니다. 그 빛은 울림이 되었고 꿈이 되었고 어느덧 숙원이 되었습니다. SBC는 대한민국 라디오의 자부심이자 클래식입니다. 이곳에서 드디어 기회를 얻었습니다. 꼭 잡아내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면접은 총 3명이 들어갔는데, 가운데 내가 있었고 양 옆에 모두 여성 지원자였다. 맞은편엔 뉴스에서 아주 많이 봐왔던 사장과 역시 9시 뉴스를 틀면 나왔던 보도본부장, 라디오 국장 등 화려한 면면을 자랑하는 면접관들이 마주하고 있었다.


휴~ 역시 라디오PD는 여자들이 강세군


경쟁자를 보니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면접을 진행하면 할수록 내게 유리한 판이 짜여만 갔다. 전략이 적중했던 것이다. 당시 이슬람교를 둘러싼 중동지역의 전쟁 상황을 체크하고 시아파, 수니파, IS(이슬람 국가) 등 국제 정세를 공부하고 들어갔던 게 효과를 발휘했다. 안타깝지만 다른 두 명의 경쟁자는 해당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보도본부장으로부터 성패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질문이 나 혼자에게만 주어졌다.


담담댄스님은 존경하는 정치인이 있습니까?



아뿔싸, 내 전두엽 왜 이러지? 이렇게까지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질문할지는 몰랐다. 갑자기 뚝딱거리고 Nerdy해져만 가는데, 정말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또렷하게 기억날 명답변을 꺼내고야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와, 이 ㅂㅅㅅㄲ


말을 꺼내는 동시에 아차 싶었고, 내 입을 내 손으로 후드려 패고 싶었다. 그 채용이 왜 벌어졌는지만 생각해도 절대 꺼내서는 안 되는 답변. 차라리 내가 엄청난 노사모의 일원이었다면, '에이씨, 결국 니들 이거였어? 이따위 방송국 안 들어가도 상관없어!'라고 자기합리화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 이름이 나왔는지는 정말 아직도 미스터리다.


물론 그분을 여전히 좋아하긴 한다. 하지만 2025년, 40대 아재인 나는 몇 번의 대선, 총선, 지선을 거치면서 파랑도 찍었다가 빨강도 찍었다가 녹색도 찍었다가 노랑도 찍었다가 주황도 찍었다가. 아무튼 그런 사람인 것을....... 왜 내 입이 그 순간, 그분을 꺼냈는지 모르겠다. 들어가지 말라는 조상신의 계시였나 싶기도 하고.


이후의 나는 그분의 정치적 업적은 무시하고, 인간미를 강조하는 데 시간을 쏟았지만, 그때까지 그렇게 초롱초롱하게 나를 바라보던 면접관들의 눈빛은 짜게 식었고,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탈락이 확정된 채로 면접장을 쓸쓸히 빠져나왔다는 얘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일함을 열어봤지만 결과는 역시나 불합격. 그렇게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라디오PD의 꿈을 접었다.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서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했다. 나는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가든 상관없다. 남들이 적게 간 길이든, 많이 가본 길이든.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내가 '선택'하기만 했다면 상관없다.


불합격 이후, 나는 가지 않은 길조차 부러워했다. PD 지망생 사이에 도는 '최종면접 탈락 증후군'을 제대로 경험했다. 한동안 라디오를 외면했고, 버릇처럼 쌓여 이젠 정말 라디오를 듣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선택받지 못한 자, 가지 못한 길을 동경해 오며 살아온 내가 위안 삼는 질문이 하나 있다.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그 일이 맞지 않는다는 걸 나중에 깨달으면 어쩌나


안다. 이 모든 생각이 누추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그때의 그 답변을 후회하냐고?


응응! 몹시 후회해!!!


하지만 어쩌겠어. 설익은 서른둘의 어리숙함도, 어리석음도 모두 나였던 것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앞으로도 나는 셀 수 없이 실수하며 살 거다. 하지만 그 실수가 나를 늘 가르쳐 주었으면, 깨우쳐 주었으면 좋겠다. 실수 없이 안주하며 나태해지는 삶보다는 아주 조금은 낫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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