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전어같은 플레이리스트
바야흐로 가을이 왔다.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이라는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이다. 아직은 여름이 놓아주지 않는 초가을 문턱에서 한없이 센치해지고 싶은 그런 날, 어울릴만한 추모곡(秋慕曲)을 들고 와 봤다. 가을을 기다리게 하는 전어처럼 꼭 들어줘야할 노래들, 오랜 노래들이지만 여전히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래들.
학창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여가수를 꼽으라 하면 나는 제이를 첫 손에 꼽는다. 매혹적인 눈매와 공기와 습기를 한껏 머금은 목소리는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외모는 거의 100% 이상형이다. (완전 100% 이상형과 한 집에서 살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타이틀곡 <어제처럼>의 빅히트로 그녀의 대표앨범이 된 정규 2집 수록곡 <831 8>은 항상 내 플레이리스트에 담겨 있는 노래다. 솔리드의 멤버, 정재윤이 작사, 작곡한 노래로 스산한 계절감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노래다.
'831 8'은 'I Love You'를 의미한단다. 무슨 말이냐고? 여덟 글자, 세 단어, 한 가지 뜻에 마지막 8은 옆으로 눕혀 ∞ 즉, 영원을 뜻한다. 윽, 설명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당시는 삐삐가 한창 유행이었으니 이 흐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자)
이 노래는 원곡을 올릴지 리메이크곡을 올릴지 무척 고민하다 원곡을 올렸다. 헤이즈의 스타일로 편곡해서 부른 리메이크 버전도 무척 좋지만 역시 원곡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노래. 이 리듬감을 좀 더 좋아해서 그런가 보다. 전주만 듣고도 아! 이 노래구나 알 수 있는 숨은 명곡이다.
담담하게 부르는 보컬 이면에는 이별 후 짙은 그리움의 정서가 깔려있다. 그 옛날, 싸이월드 도토리를 털어갔던 BGM 명곡으로도 손꼽히는 <일기>의 작사가는 성시경 <너의 모든 순간>의 '이윽고'로도 유명한 심현보다.
여전히 앳된 모습 덕분인지, '한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라는 수식어가 무척 안 어울리는 모양새지만 장나라는 실로 그러하다. 데뷔 이후 3년 안에 가수로도, 연기자로도 정상을 찍은 슈퍼스타였지만 이 노래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녀를 가요대상 수상자로 만든 2집에 비해 성적도 안 좋았고, 당시 심각한 무대공포증을 겪고 이 앨범 이후 한동안 가수로서의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내겐 가을이라는 계절감과도 무척이지 잘 어울리는 노래가 됐다. 무엇보다 이 노래의 클라이막스에서 "정말 마지막이니"할 때 '정말'을 발음하고, 발성하는 특유의 공기 가득한 내지름을 감히 사랑한다.
가을은 이상하리만치 짧지만, 그래서 추억은 강렬하다. 가디건을 꺼내고, 스산한 바람을 맞고, 사각사각 낙엽을 밟을 때쯤이면 오늘 추천한 노래들이 한없이 센치한 무드로 우리를 데려다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