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문학동네, 2025)를 읽고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예요?
라는 질문에 어김없이 나는 김애란이라고 답해 왔다. 그녀가 문장을 쓰는 방식, 그 문장에 담으려 추려낸 사실과 정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조, 모든 것이 취향이라 말할 수 있었다. 아니, 그녀 덕분에 소설에 대한 취향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표작 『두근두근 내인생』을 읽고 난 후, 나는 글쓰기 방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그녀처럼 써보려고 노력했다.
태생적으로 수준이 달라 결코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실로 많은 도움을 얻었다. (아무도 내 글을 보고 김애란을 떠올리지 않겠지만) 간결한 문장에 담담한 자기고백적 글투를 지향하게 됐다. 지금은 조금 다른 문장도 써보고자 하지만 나의 30대를 관통하는 김애란의 문장,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며 모든 문장을 이렇게 쓰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안녕 하고 물으면, 안녕 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김애란 소설집 『달려라 아비』 중
하지만 이제 나는 김애란의 팬이라 자처하기 몹시 민망한 상황이다. 먹고 사느라 바빴다는 치졸한 핑계로 그녀의 신작들을 체크하지 못했고 소설은커녕 유튜브와 넷플릭스 챙겨보기에도 허우적대는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불현듯 알라딘 검색창에 김애란을 써넣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곳에 글을 쓰면 쓸수록 내 문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을까. 새로운 영감? 자극?이 필요해서였을까. 그냥 궁금해서 그랬을 거다.
오! 2025년 6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작이 있네?
본의 아니게 이전 작들을 스킵하고, 그녀의 가장 최신작을 탐독해 보고 싶었다.
나는 소설을 사면 앞, 뒤 표지부터 살펴본다, 누구의 추천(사)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사실 소설과 큰 상관없지만 인간적인 호기심이랄까.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운명 같다. 서평을 쓴 이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가이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이기 때문이다. 최애와 최애의 만남. 두 대가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나 쓸법한 언어로 설명하니 몹시 미안한 마음이지만, 실로 정말 그러하다.
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김애란을 사회학자라고 부르는 게 사회학자에게도 그럴 테지만 김애란에게도 최선의 평가일 순 없다.
이 문장은 정말 신형철의 것이며, 신형철 만이 쓸 수 있다. 특유의 정확함으로 누구보다 다정함을 보여주는 사람. 이 문장에는 김애란을 소설가가 아닌 사회학자(아마도 존중의 의미를 담아)로 평가하면서도, 그 말의 의미가 정확히 그녀를 존중하는 데 활용되지 못할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담겨있다. 이 책을 읽고, 왜 문학평론가는 소설가를 사회학자라 규정했을까. 이 정도의 궁금증은 스포일러라기보다, 모티베이션이라 해야 좋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열었다.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에는 나를 그녀의 팬으로 만들었던 함축된 정서가 담긴 간결한 문장들, 간간이 엿보이는 재기발랄함, 말(언어)이나 가족애와 같은 관념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주제관을 찾아보기 어렵다. 위트와 천진난만함이 난 자리는 직설과 자조가 들었다. '코로나, 부동산, 사기, 이혼, 자영업자'처럼 신문 경제/사회면에 어울릴 법한,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소재들이 다양한 서사와 특유의 문장을 입었다. 신작을 읽고 나니 낯섦과 반가움이 묘한 공생관계를 이뤘다.
문득 나무위키를 찾아보았다. 2025년의 김애란은 40대 중반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어쩐지, 그녀의 작품에서 또래의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과 스트레스를 체험한 것이 새삼 놀랍다가도 그럴 만하다 안도했다. 내 기준에 좋은 소설이라면 개연성이든 핍진성이든 (가상)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니까. 그녀의 주변에서 가장 빈번히, 가장 딱하게 여겨지는 에피소드들이야말로 2025년의 그녀가 제일 잘 쓸 수 있는 글일 테니까.
장편소설과 소설집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활자 집중력이 떨어지는 내 독해력을 감안하자면 장편보다는 소설집의 형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다만 소설집은 뮤지션의 정규앨범 트랙리스트가 그러하듯, 일종의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김애란의 신간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꼽아보자면 '계급'과 '위로'인 것만 같다. 계급과 위로는 별개의 층위에서 따로놀지 않고 때로는 인과관계로, 때로는 선후관계에 따른 순환의 형태를 띤다. 그리고 두 가지 주제의식을 '돈'이 매개한다.
성공한 사업가의 홈파티에 초대받아 호스티스의 고상한 체하는 우월의식에 반감을 느껴 특유의 연기력으로 우아하게 되갚아주며 뿌듯해하는 중견 여배우 이연(「홈파티」), 친정어머니의 생계를 일부 분담해야 하는 처지에서 금수저 남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자존심은 지키고픈 비자발적 프리랜서(「숲속 작은 집」), 자신보다 어렵게 사는 것 같은 공부방 학생과 그 엄마에게 묘한 연민과 우월감을 느끼다 그 집이 신축 아파트로 이사한다는 소식을 듣자 기분을 망쳐버린, 전세 만기를 앞둔 공부방 선생님(「좋은 이웃」).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계급(자본)적 열등감을 재능과 지식, 휴머니즘 같은 무형의 가치로 덮어보려, 넘어서려 한다. 당신보다 돈이 없다면 당신보다 안목이 높다든지,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든지, 부득이한 갑을 관계를 이용해 보는 식으로(「이물감」) 자존심을 세워 보지만, 이내 가난과 고독이 자아내는 허무와 무력감에 막막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계급적 인식을 배경으로 두고,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삭여가며 살아낸다. 표제작 「안녕이라 그랬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Love Hurts> 가사 속 'I'm Young'을 '안녕'으로 들었던 전 연인을 떠올리며, 그를 떠나게끔 만들었던 당시 그의 처지와 정확히 같은 상황에 처해 힘들어하고 있는 스스로를 인식한다.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다른 이의 눈에는 쓸모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원어민과의 온라인 영어수업에 덜컥 등록, 거기서 만난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 끌림을 느끼는 방식으로 오묘하게 위로를 얻는다. 비록 결말은 잔액 부족으로 화면이 끊겨 '안녕'이란 마지막 한 마디조차 듣지 못했지만.
마지막 작품 「빗방울처럼」에서의 지수는 전세사기의 여파로 남편을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었다. 별수 없이 매매한 전셋집의 천장 누수를 고치고 도배까지 의무적으로, 어쩌면 일종의 의식처럼 생의 마지막 미션을 마치고 죽음으로 향하기 전,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누수의 환청이 그녀를 붙잡는다. 그녀가 간절히 다잡은 생의 의지 끝자락에는 생면부지의 외국인 도배사가 건넨 한마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가 있었다.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이의 정중한 문장. 이 한 마디야말로 부재와 상실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적확한 위로의 한 문장이 아닐까.
한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팬데믹, 부동산으로 대변되는 빈부의 격차, 가진 만큼 결정되는 사회적 지위와 이에 상응하는 상대적 박탈감. 이러한 구조적인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김애란은 담담하고 간절하게 '살아야' 한단다. 이것이 낯섦 속에서 발견한 그녀의 익숙함이었다.
이 책은 현실의 부조리를 짚어내야 하는 사회학자로서의 의무와, 이로 인해 상처받은 개별적 인간을 위로하는 소설가로서의 의무를 모두 충실히 수행한 김애란의 휴머니즘을 오랜만에 경험할 수 있었던, 그런 작품이었다.
나를 김애란의 팬으로 만든 한 단어, '안녕'이 표제작의 제목으로 쓰인 것에 유독 마음이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건지 몰라도,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쓰는 단어가 같은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안녕(安寧)을 바라는 마음으로 만날 때, 그리고 헤어질 때 건네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人事). 안녕은 인사의 본질이자 인간의 본성에 가장 닿아 있는 표현이다.
내가 이토록 '안녕'에 대한 맥락과 함의에 천착하게 된 것도 모두 김애란 때문, 아니 덕분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부디 안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