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 관람후기
아마 아이를 낳고 3주 간의 짧은 육아휴직에 들어갔을 때로 기억한다. 모든 것에 서툴렀던 초보아빠.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는 아기와 씨름하느라 전전긍긍했지만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성장속도가 빠른 그 시기, 그 시간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때였다.
돌이켜 보니 잠이 부족한 것만 빼면 이후의 육아 난이도에 비해 가장 쉬웠던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육아의 피로를 달래며 뭔가 즐기고 싶었던 마음에 넷플릭스, 그것도 아주 장편의 시리즈물을 감상하기로 결심했다. 나름 여유가 있었던 게지.
두 편의 작품이 선택받았다. 하나는 95부작에 달하는 <삼국지>였고, 다른 하나가 오늘 다룰 <귀멸의 칼날>. 나는 어떤 단어나 글자에 꽂히면 노래 가사를 바꿔부르는 희한한 습관이 있는데, <귀멸의 칼날>을 볼 때마다 내 입에서는 군가 <멸공의 횃불>이 재생되고 있었다.
귀멸의 칼날(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귀멸의 칼날, 그리고 멸공의 횃불. 같은 글자는 '멸(滅)' 하나뿐인데. 사실 '멸'이 이 작품을 함축하는 한 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귀살대원들이 귀멸의 칼날 아래 목숨을 거는 이야기니 아예 얼빠진 노래는 아니었으리라.
이 익숙한 듯 낯선 향기는 뭘까. <귀멸의 칼날>은 익숙함의 장점과 낯섦의 장점을 한데 합쳐놓은 수작이었다. 이후로 나는 시리즈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마치 <더 글로리>나 <폭싹 속았수다>를 기다리는 것마냥 신작을 빠르게 해치워 나갔다.
현재 넷플릭스에는 '합동 강화 훈련 편'까지 공개된 상황이며, 오늘 소개할 부분은 극장판으로 선공개된 <귀멸의 칼날> 결말부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무한성 편'이다. 긴 추석연휴의 첫날, 자애로운 아내의 컨펌을 받고 나홀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을 조조로 관람했다.
뭔 영화가 2시간 55분이나 해!!!
아내는 애니메이션이니 한 시간 반 정도면 끝나겠지 생각했다며 보내줬다고 한다. 남편들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잊지 말아야 할 단 한마디, 바로
허락보다 용서가 빨라요~
사실 알았지만 말 안했지롱 ㅋㅋㅋㅋ
이후의 내용에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원작이나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Skip해 주셔도 무방합니다 :)
- 애니메이션만이 선보일 수 있는 시·공간으로의 확장적 발전
애니메이션으로 <귀멸의 칼날>에 입문했지만, 결말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네이버웹툰 쿠키를 굽고야 말았다. (캬! 자본주의 만세다) 만화라고 해서 재미와 감동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스토리의 스펙터클함과 그에 따른 몰입감은 결국 모든 전투가 마무리되는 순간, 감동으로 울컥하게 물들였다.
자, 이제 순서 퍼즐을 맞춰보자. 만화는 이미 완결이 났고, 애니메이션은 '합동 강화 훈련 편'에서 최후의 빌런, 끝판왕 키부츠지 무잔과의 마지막 결투를 앞두고 탄지로와 주(귀살대에서 각 호흡법의 최고 권위자)들이 우부야시키 카가야 오야카타사마(큰 어르신) 거처로 집결하면서 마무리된 상태다.
아.... 안 되겠다. 친절병 또다시 발동! 스토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산골에서 숯을 만들어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오던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13세). 숯을 팔고 밤새 집에 돌아오니 가족은 몰살돼 있고,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누이동생은 안타깝게도 혈귀(おに, 도깨비)로 변한 후다. 동생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탄지로는 근처를 지나던 귀살대원(혈귀사냥꾼), 수주(물의 호흡 최고 권위자) 검객 토미오카 기유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이내 동생의 목을 베려는 기유에게 동생의 목숨을 구걸하며 스스로 귀살대에 뛰어든다.
탄지로의 인생에 치명적인 비극을 안겨준 혈귀 대장 키부츠지 무잔과 그의 피를 물려받은 수많은 혈귀들은 인간의 피를 먹어가며 불멸의 삶을 이어간다. 모든 혈귀들은 마치 드라큘라처럼 밤에만 활동할 수 있으며 해가 뜨면 타 죽고 만다. 아니면 수련을 거친 귀살대원의 검을 통해 목이 잘려나가야만 소멸될 수 있다.
고된 훈련과 실전 경험을 통해 탄지로는 호흡법을 익혀가며 검객으로서 한층 성장해 나가고, 귀살대원 동료들, 귀살대의 최고 실력자인 9명의 주들과 함께 수많은 혈귀들을 무찌르며 어느새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로 거듭난다. (이렇게 퉁칠 얘기가 아닌데......)
탄지로와 9명의 주, 그리고 귀살대 동료들은 마침내 무잔 일당과의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 배경은 중력도, 위아래도 뒤틀려버린 무한차원의 공간. 이른바 ‘무한성’이다!
결국, 만화에서 몇십 개의 선으로 그려낸 2차원의 무한성을 애니메이션에서 3차원의 공간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이번 극장판 관람의 첫 번째 관건이 되었다. 마지막 결전지인 무한성은 무잔과 혈귀 나키메(상현 4, 무잔 다음다음다음다음 센여자)가 만든 혈귀들의 안식처로 해가 떠있는 동안 몸을 숨길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이며, 상하좌우 구분이 없이 중력조차 조절할 수 있는 가상세계다. (점점 쓰면서 드는 메타인지인데요... <귀멸의 칼날> 모르는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저는 어마어마한 오타쿠 같겠군여 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유포터블(Ufotable)'은 이미 수준 높은 작화와 연출로 동시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평가받고 있지만, 과연 탄지로와 무잔의 마지막 결전을 다룬 무한성, 그리고 각 전투씬을 3D로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에 대해 팬들은 기대와 우려 섞인 반응을 보여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하며 기대를 훨씬 넘어선 결과물을 선보였다. 일본 특유의 목조건축물이 상하좌우로 이어지며 무한히 뻗어나가는 공간의 스케일을 스크린에 구현해 냈으며, 오히려 만화가 주지 못했던 크리에이티브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 하나의 관건은 바로 전투씬. 무한성이야 움직이지 않는 배경이지만, 더욱 궁금하기도, 의심을 품기도 한 것이 바로 이 전투씬의 구현가능성이었다.
저마다의 호흡법과 멸식으로 화려한 움직임과 기술을 드러내는 결투 장면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
아니,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역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욱 완벽한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유포터블 진짜 따따봉!) 2차원의 전투씬을 3차원으로 옮기려면 칼(무기)과 대결주체의 동선이 상하좌우, 천방지축으로 현실감 있게 구현돼야 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평면에는 없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결부돼야 한다는 점이다. 즉, 휘두르는 모션이 자연스러워야 하면서 그 속도감 역시 위화감이 들어선 안된다는 뜻이다.
나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을 보면서 공간감이나 모션보다 유독 ‘시간’이라는 변수를 자주 떠올렸다. 만화에는 없지만 애니메이션에만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이 시간을 장면마다 어떤 비중과 속도로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애니의 성패가 갈린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의 순수 러닝타임은 무려 2시간 35분이지만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지루하거나 몰입에 방해를 주는 분량 배분이 극히 드물었다. 화려한 전투씬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겨내는 크리에이티브 과정에서 배어든 고민의 흔적이 아이러니하게도 원작에 가장 충실한 전개를 가능케 한 것이다.
서두에 밝혔듯, <귀멸의 칼날> 전체 스토리를 익숙함과 낯섦이 주는 장점만 담아낸 수작이라 평한 바 있다.
일본 애니 특유의 익숙함은 주인공의 성장 과정과 이를 중심으로 한 서사의 전개 방식에 있다. 쉽게 말하면 별 능력은 없지만 영웅의 자질만은 타고난 주인공이 불의의 시련을 겪고, 범인(凡人)보다 월등한 속도로 성장하며 차례차례 적을 무찌르다 궁극에는 자신에게 시련을 주었던 당사자, 끝판왕 빌런을 물리치는 서사. <슈퍼 마리오>(게임이지만)도 <드래곤볼>도 <슬램덩크>도 <원펀맨>도 모두 이 작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귀멸의 칼날>은 친절하게도 귀살대와 혈귀에 모두 계급(등급)을 부여해 성장캐 주인공 탄지로의 능력치를 더욱 계량화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정했다.
가급적 악인/악당으로 묘사된 캐릭터에게도 개연성을 부여해 서사를 입히는 방식 또한 입체적이고 트렌디해 보이지만 점차 전형화되고 있는 스토리텔링 기법이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히 선 vs. 악의 대결구도에 따른 권선징악형 해피엔딩에서 벗어나 작품 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하며, 풍성한 재미와 보다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작품에서 공감대를 만들지 못해 오히려 공감이 가는 유이한 빌런 캐릭터는 사이코패스 사이비 교주 도우마(상현 2, 무잔 다음다음 센놈)와 투덜이 스머프 카이가쿠(상현 6, 무잔 다음다음다음다음다음다음 센놈)뿐이다. 그래서 이들이 죽을 때 더욱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여타 저패니메이션과 다른 <귀멸의 칼날>만의 낯섦은 오묘한 시대적 배경과 빌런의 정체성에 있다. 이 작품은 일본 전통의상과 양장이 공존하며 전통적인 목조건물과 서양식 증기기관차가 함께 등장하는 1910년대 초반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삼아 현실감과 판타지스러움을 동시에 자아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시대적 배경과 미장센이 특유의 기괴함과 그로테스크를 보여주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처럼.
게다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이 유입되고, 상공업이 발달해 대도시가 등장했으며, 러일전쟁의 승리로 정신적인 자신감도 최고조에 달했던, 이 시기 일본은 근대화로 꽃길을 걷는 시기다. 상대적으로 도농 간 빈부 격차는 더욱 극심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전통적인 부호이자 불멸의 빌런 무잔은 트렌디한 수트 차림으로 등장하지만, 또 다른 빌런들은 가난에 못 이겨 혈귀가 되기도 하니 시대와 서사의 맥락 역시 합치하는 부분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여기에 빌런들을 단순한 괴수로 설정하지 않고, 일본의 오랜 도깨비 캐릭터를 차용했으며 여기에 서양의 드라큘라(흡혈귀) 속성도 가미해 공포감과 위압감을 자아내는 <귀멸의 칼날>만의 빌런을 탄생시켰다. 여기에 저마다의 서사를 빌런 캐릭터 그 자체로 입혀, 혈귀의 아이덴티티라 부를 수 있는 혈귀술과의 연관성을 높인 설정은 다양한 스토리 전개를 가능케 했던 탁월한 아이디어 한 수다.
+) 추가로 귀살대원과 주들이 쓰는 호흡법(검술)이 뭔가 중국의 취권이나 당랑권처럼 무술비기에서 차용한 것만 같아 개인적으로 익숙하고도 신선했는데, 내가 일본의 격투 만화/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지 못해 이런 식의 기술(무술)이 다른 작품에서도 클래식하게 적용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칭찬만 할 건데 소제목을 왜 함정이라고 했냐고? 알고도 당했다는 거지 뭐...
이 영화의 전투씬은 크게 총 3번 나온다. 첫 번째는 번개의 호흡 계승자이자 탄지로의 동료 젠이츠 vs. 상현 6 카이가쿠, 두 번째는 충주 시노부 vs. 상현 2 도우마, 마지막으로 탄지로 - 기유 연합군 vs. 상현 3 아카자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이며 비중 있는 대결은 세 번째로 등장하는 탄지로 - 기유 연합군 vs. 상현 3 아카자의 혈전이다.
우선 상현 3(무잔 다음다음다음 센놈) 아카자는 또 다른 극장판 흥행작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의 메인 빌런으로 전작에 등장한 바 있고, 짧은 등장 대비 강렬한 임팩트로 <귀멸의 칼날>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염주 렌고쿠 쿄주로를 죽인 원흉으로서, 시리즈 내내 다른 상현 혈귀에 비해 존재감이 컸다.
특히 도깨비가 되기 전인 인간 시절, 주먹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소류'(격투기의 한 종류인 것 같음) 계승자였기에 무도에 대한 존중과 강함에 대한 추앙심을 가진 독특한 혈귀 캐릭터다. 검을 가지고 싸우는 탄지로와 기유를 맨손으로 대항하는 아카자의 격투 장면은 그 자체로 화려한 볼거리가 되었다. 세 번의 대결이 이어질수록 액션의 스펙터클이 상승했기에, 탄지로-기유 vs. 아카자의 대결이 이번 애니메이션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아카자는 가장 납득이 가는 서사를 입은 악역이다. 빌런 중 주인공에 해당하는 무잔보다 더욱 안타까운 인간시절의 사연을 갖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회상씬에 눈물 흘리고, 감동받았지만 내게는 좀 지루한 면이 있었다. 이 역시 그림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면서 수반되는 시간 배분의 문제였던 것 같다.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액션씬 바로 뒤에 감성적이고 감동적인 회상씬이 붙으니 동일한 시간값이 상대적으로 다르게 느껴졌다. 웹툰으로 볼 때, 회상씬은 나만의 속도로 가볍게 훑으며 넘길 수 있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개연성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할애돼야 하는 시간의 역설이 있다. 이 괴리가 지루하게 느껴져 아쉬웠지만 불가피한 부분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아무래도 러닝타임 자체가 길어서 더욱 힘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제 <귀멸의 칼날> 극장판으로는 총 두 편이 남았다. 원작을 다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번 무한성 편을 관람했다면, 개인적으로는 원작의 결말까지 확인한 후에 향후 개봉할 두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스토리를 모르는 채로 서사와 스펙터클을 따라가기에 앞으로의 이야기는 더욱 벅찰 것 같다. 남은 혈귀는 상현 2와 상현 1 그리고 무잔, 이렇게 더욱 강한 상대밖에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예측일지도.
아직 <귀멸의 칼날> 입문도 못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넷플릭스를 비롯해 웬만한 OTT에는 이번 극장판의 이전 시리즈인 '합동 강화 훈련 편'까지 업로드 돼 있으니 천천히 호흡을 갖고 보다 보면 아마 다음 이야기를 극장에서 개봉할 때쯤 될 거다. 나 역시 살다 보면 그날이 자연스레 와 있을 테니, 이 기다림도 즐겁게 만들어야지.
마지막으로 무한성 렌더링에만 3년 반이 걸릴 거라던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제작 1년 반 만에 세상에 내보낸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의 유포터블 제작진 일동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표지 및 본문 이미지 출처_애니맥스브로드캐스팅코리아 (본 글은 상업성 목적이 아닙니다만, 문제 시 바로 삭제 조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