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쓸모의 쓸모

무용의 효용, 제목으로 뭐가 더 나아요?

by 담담댄스

정년이 65세까지 연장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환희보다는 절망이 먼저였다.


이 무슨 근자감이냐만은 나는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끈기 있게 해내는 편이라, 그 일이 그저 버티는 것이라면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자존심은 낮고, 자존감은 높기에 굴욕? 무시?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개의치도 않는다.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을 떠올리면 무릎 꿇고 무한 스핀도 돌 수 있고, 가랑이 밑을 기어 다니는 일도 기꺼이 할 만하다.



정년연장에 절망한 이유는 정말정말 일이 싫다는 것이다. 정말 너무너무 일하기 싫다. 먹고사니즘만 아니면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스타벅스 알바나 하면서 소소하게 생활비 정도 벌면 만족한다. 이따금 잘 나가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얘기 들어주고 밥 한 끼 얻어먹는 삶을 택할 것이다.


근데 지금까지 15년을 일했는데, 정년이 연장되면 지금까지 일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한다는 거다. OMG. 최악이다. 우리 윗세대 아버지들만 봐도 은퇴 후에 좀이 쑤셔서 이것저것 손대다 멀쩡히 살고 있는 집까지 팔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실로 노 이해, 나는 Low Risk, Low Return 신봉자로서, 빨리 은퇴하고 큰 욕심 안 부리며 적당히 잘 어울려 지내다가 너무 안 아프게 저 세상 가고픈 마음뿐이다.


물론 나중에, 지금의 직장을 잘 마무리하면 해보고 싶은 건 엄청엄청 많다. 사실 지금하면 더 좋긴 한데... 아이가 어려 아직까지는 해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리스크는 전혀 없고 그래서 쓸모도 없는, 대체로 다 무용한 것들이다.


내 원체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中


<미스터 선샤인> 캡처 2018, tvN All right reserved




나는 남들이 쓸모 있다고 하는 것들에 도무지 끌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자기계발서 같은 것. 군대 있을 때 옆에서 누가 읽길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따라 읽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런 책들은 나와 맞지 않는구나 섣불리 단정지어 버렸다. 좋은 문구들을 늘 기억하며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당연한 얘기를 굳이 책으로 배워야 할까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체로 쓸모와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태생적으로 '왜'나 '무엇을'보다 '어떻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없어도 되는 것,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을 쏟는 것이 천성이라 여겼다. 수많은 단어들이 있지만 형용사나 부사 같은 낱말에 끌리는 이유도 '특별한 이유 없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지금 간절히 하고 싶은 쓸모와 소용없는 것들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1. 테니스


무용(無用)의 극치인 그깟 공놀이 중 내가 한 번도 도전해 보지 못한 개인 구기종목을 꼽자면 골프와 테니스, 이렇게 두 개다. 그러나 골프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많은 함의가 담겨 있는, 운동 아닌 운동이 되어버렸다. 골프는 확실히 쓸모가 있는 운동이다.


여담이지만 회사에서 그렇게 '공을 친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사실 공을 치는 스포츠는 야구도 있고, 탁구도 있고, 테니스도 있는데 굳이 골프에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골프는 운동 이상의 운동, 운동이 아닌 운동의 반열에 오른 것 같다.


그런 쓸모 탓인지, 골프는 영 끌리지 않는다. 진입 장벽이 높고(비싼 그린피와 장비값, 레슨비 등) 아예 멋모르던 시절부터 쳤으면 모를까, 뭔가 야망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만 같아서 꺼려지는 면도 있다. 필드에 한 번 나갈라치면 최소 한나절, 최대 하루 종일(심지어 숙박까지 필요한) 걸리는 운동이니 육아를 핑계로 거절하기도 좋다.


결국 테니스만 남는데, 테니스는 정말 언젠가는 꼭 한 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운동이다. 그 이유를 애호가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뀌겠지만, 바로 로저 페더러 때문이다. 나는 로저 페더러의 백핸드 스트로크야말로 멋을 넘어, 우아함이라는 어나더레벨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땀 튀기고 숨 터지는 전쟁터 같은 코트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엘레강스가 페더러의 백핸드에 있다.




남자 테니스 선수 중 GOAT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노박 조코비치를 꼽겠다. 그리고 페더러 평생의 라이벌, 흙신 라파엘 나달 역시 레전드라 해도 손색없는 커리어다. 이 둘에 페더러까지, 세 명이 차지한 메이저(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 트로피만 해도 합쳐서 66개며, 러프하게 계산해도 세 명이 20년을 해 먹었으니 뭐... 말 다한 셈이다. (20년 동안 선수생활을 한 걸 넘어, 톱 레벨을 유지했다니까!)


하지만 이런 레전드 플레이어인 조코비치도, 나달도 백핸드 스트로크를 투핸드로 보낸다. 원래 백핸드는 라켓을 쓰는 종목을 불문하고 모든 선수들의 약점이다. 포핸드에 비해 가동범위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쓸 수 있는 근육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렇다. 테니스라면, 백핸드로 공이 왔을 때 한 발짝 더 달려가 공을 최대한 몸에 붙여놓고 라켓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 최대한 강하게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 레전드 중 페더러만이 원핸드로 백핸드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원핸드 백핸드는 남들보다 한 발짝을 덜 가도 돼 숨을 헐떡이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며, 가동범위도 늘어나 다운더라인(직선), 크로스(대각) 샷에서도 페이크 동작과 깊은 각을 보여줄 수 있다. 이 점이 페더러가 셋 중 유일하게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고,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도록 만든 원동력이라고 하면 확대해석일까.


저 대단한 나달과 조코비치도 못한 원핸드 백핸드를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구사해보고 싶다. 아마 백핸드는커녕 포핸드 스트로크도 허접하게 치게 되겠지만, 그 정도 꿈이라도 꾸지 않으면 무언갈 시작할 각오가 돼 있지 않은 것만 같아서. 집 근처에 테니스 코트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테니스 잘쳐서 일신의 영달에 아무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일신의 영달이야말로 내겐 전혀 쓸모가 없다.



2. 일본어


이건 좀 이견이 있을지도. 하지만 일본어 습득의 목적 역시 커리어와는 무관하니 무용의 영역으로 간주해 주길 바란다.


어쩌다 보니 일본 애니를 많이 보게 됐다. 이게 재미가 붙어 점점 대작들을 접하다 보니 대사 하나하나의 말맛을 원어민의 시각에서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썼던 「진격의 거인」 리뷰 제목을 'ただいま'로 잡긴 했는데, 내가 정확한 맥락과 어감까지 이해하고 쓴 건지, 스스로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아직도 사라지질 않는다.


요즘 이런 일본어 바람에 불을 붙인 건, 너무나도 유명해진 한 먹방 유튜버의 노래 영상이다.




그래, 이 먹방 유튜버의 본업은 '발라드'다. 성발라, 성시경이 back number의 <ヒロイン>(히로인)을 불러 유명해진 것은 그의 가창력도 있겠지만 곡 해석력도 한몫했으리라. 성시경은 원어민 수준으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어, 아무래도 가사의 무드와 맥락을 보통의 한국인들보다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을 거다. 이런 해석에 기반해 가창했기에 많은 이에게 닿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무엇보다 내가 주목한 것은 J-POP 특유의 노랫말이었다.


君の街に白い雪が降った時(키미노 마치니 시로이 유키가 훗타 토키)
네가 있는 거리에 하얀 눈이 내리는 순간

君は誰に会いたくなるんだろう(키미와 다레니 아이타쿠 나룬다로)
너는 누구를 만나고 싶어 할까

雪が綺麗だねって誰に言いたくなるんだろう(유키가 키레이다넷테 다레니 이이타쿠 나룬다로)
눈이 아름답다는 말을 누구에게 하고 싶어 할까

僕は やっぱり僕は(보쿠와 얏빠리 보쿠와)
나는 역시 아무래도 나는

雪が綺麗と笑うのは君がいい(유키가 키레이토 와라우노와 키미가 이이)
눈이 아름답다며 웃는 건 너였으면 좋겠어

でも寒いねって嬉しそうなのも(데모 사무이넷테 우레시소-나노모)
그런데 조금 춥다며 기뻐 보이는 것도

転びそうになって掴んだ手のその先で(코로비소-니 낫테 츠칸다 테노 소노 사키데)
넘어질 뻔해서 붙잡은 손 너머에서

ありがとうって楽しそうなのも(아리가톳테 타노시소-나노모)
고맙다며 즐거워하는 것도

全部君がいい(젠부 키미가 이이)
전부 너였으면 좋겠어


특유의 수동적인 정서라고 해야 할까. '눈이 아름답다며 웃는 건 너였으면 좋겠어, 넘어질 뻔해서 붙잡은 손 너머에서 고맙다며 즐거워하는 것도 전부 너였으면 좋겠어'라는 가사는 K-발라드의 노랫말로는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K-발라드였다면


눈이 내리면 언제나 네가 생각나
너의 미소, 너의 손길, 너 없는 하루를 버틸 자신이 없어.


대략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 (끙... 작사는 못하겠구만;;) 사랑의 고백이든, 이별의 아픔이든 좀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묘사하다 보니 좀 더 직구처럼 꽂히는 느낌이랄까. 반면에 J-발라드 가사는 감정을 철저히 드러내지 않고 좀 더 심상을 그려내는 방향으로 추억을 묘사한다. 내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상대방의 탓을 하지도 않는 답답하고도 담담한 표현.


어렸을 땐, 모든 첫사랑을 때려죽여도 이어주지 않던 일본의 노래, 영화, 만화 모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한 번도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근데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런 담백함이 좀 더 아련하고 애잔하게 다가온다. 일본어를 공부한다면 좀 더 많은 노래와 콘텐츠의 참맛을 알고 누릴 수 있게 되겠지. 이건 늦지 않았으니 작심삼일, 새해부터 바로 시작해 보련다. (새해까지 무려 2주나 남았다고 한다...)



3. Choreography (a.k.a. 방송댄스)


무용(舞踊), 정말 말 그대로 무용하다. 그나마 예전엔 장기자랑에서라도 약간의 쓸모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쓰임새가 없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따라 익힌다.


10년 전만 해도 방송댄스 학원까지 다녀봤다. 내가 돈 주고 배웠던 것 중에 가장 재밌었던 것이다. 그때 배운 GD&태양의 <Good Boy> 안무는 정말 너무너무 멋있었고, 이 춤을 따라할 수 있게 되다니 스스로 감탄하며 감사해했다.


박재범의 춤은 너무나도 멋있어서 큰돈을 들여 개인교습을 받기도 했다. 특히 <All I wanna do>에 맞춰 원밀리언댄스 스튜디오와 콜라보한 이 안무는 압권이다. 와이프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박재범인지라, 지금도 가끔 집에서 이 춤을 시키는데 막상 하면 영 마뜩잖은 표정에 매번 민망해진다. (몸뚱이가 다른 걸 어떡해 ㅠ)


나왔을 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 스우파로 유명해진 리아킴, 효진초이, 미나명 다 있네 ㅋㅋㅋㅋ



정말 1년, 한 달,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몸뚱이는 점점 마음 같지 않아지기만 한다. 요즘 나오는 아이돌의 안무는 도통 따라할 수가 없다. 현란한 스텝과 아크로바틱, 웨이브와 팝핀은 '제발 주접 그만 떨라며' 코레오의 세계에서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데, 나 좋으면 그만 아닌가.


나는 술도, 모임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둘이 합쳐진 술자리는 많아야 한 달에 두 번 정도다. 하지만 춤을 배울 수 있다면 지금 그 어디라도 달려갈 수 있다. 와이프에게도 허락을 득했다. 어느 정도 육아가 궤도에 오르면,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춤바람이 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이 춤을 배우고 싶다.


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건가. 리에하타가 짰구나. 어쩐지 기발하고 감각적이더라.






그러고 보면 내 글 역시 큰 쓸모나 소용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널리 닿지도 않는다. 하지만 브런치야말로 무용한 것 중에서 너무 늦지 않게 잘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뭔가를 해볼 걸


싶은 후회가


롸잇 나우가 가장 어릴 때잖아


라는 실행력으로 직결된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이기에.


나는 '한 명이라도'의 가치를 믿는다.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에서 산뜻한 공감과 소소한 웃음, 깨알 같은 의미를 얻어갔으면 된 거다.(아, 그 한 명은 물론 나 포함ㅋㅋㅋㅋ) 굳이 이것이 쓸모없는 내 글의 유일한 쓸모 아닐까.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 반가워했음 한다. 무쓸모쓸모를 아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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