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에 몰리면 똥볼을 찬다

by 담담댄스

거의 뉴비 시절이지.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적막한 사무실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고성.


ㅡ 이거 오늘 누가 보고했어?! 이 새끼 이거 보고해야 할 건 안 하고, 보고 안 해도 되는 건 하고 자빠졌어 지금 제정신이야!? 누구야!!!!!!


흔치 않은 일이다. 팀장한테 깨지는 경우는 다반사지만, 임원(실장)이 직접 실무자들의 자리까지 내려와서 깨는 경우는 처음 봤고 이후에도 거의 보질 못했다. 와, 대박! 근데 아무도 실장님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거다. 그때 물색없이 고개를 돌리던 내가 당첨. 하필 실장님과 눈이 뙇 마주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막내였던 내가 얘기하는 게 제일 나았을 그림이다.


ㅡ (젠장,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ㅠㅠ 미안해요 과장님) 박OO 과장입니다. 마침 자리를 비운 모양입니다.

ㅡ 그 새끼 자리 오면 팀장하고 같이 내방으로 오라고 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과장님이 자리에 있었으면 우리팀뿐만 아니라 그 층의 모든 사람이 극대노한 실장님의 천둥호랑이 창법을 감상할 뻔했다. 무엇보다 과장님 멘탈... 그래, 실장님의 모노드라마는 우리에겐 어차피 방백 같은 거니까 주요 등장인물들만 실장님 방에서 따로 관람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A few minutes later...



상기된 것은 박 과장님의 얼굴뿐이 아니었다. 귀부터 목까지 옷으로 가리지 않은 곳은 모두 벌겋게 달아올랐다. 동행한 팀장님의 심기 역시 몹시 불편해 보였다. 박 과장님은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팀장님에게 또다시 어디론가 끌려갔다.


두 번의 내리잡도리. 이럴 땐 위로의 말조차 소용이 없다. 특히 후배라면 그냥 선배 혼자서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10분 정도 지났을까. 전 팀원을 수신으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한다. 제목은 <XX 관련 보고 요령>이다.


△△팀 여러분, 안녕하세요,

방금 전의 일은 제가 ~~한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발생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블라블라블라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모쪼록 내용 숙지하시어 여러분들이 이런 실수하지 않을 수 있도록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박OO 드림


띠로리~♭ 사실 그 실수는 그런 상황이 처음이라 누구라도 할 수 있었던 류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확률이 높은, 그냥 본인 혼자 놓쳐서 저지른 실수다. 그날은 실로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들이 흘러내려서 주워 담느라 허덕일 정도의 하루였다. 이 에피소드는 팀장님의 일갈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어휴~ 야!!! (심호흡으로 한숨 고른 후에) 너나 잘해






이후에도 나는 여러 번 비슷한 일을 경험하고 목도했다. 심지어 팀장이나 임원들도 더 윗사람에게 깨질 때 이런 모습을 많이 봤다. 이른바


핀치에 몰린 사람이 거의 예외 없이 똥볼을 차는 모습을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멘붕 상태를 경험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기저에는 자신의 실수를 곧장 만회하려는 강력한 몸부림 욕구가 자리한다. 오랜 회사생활을 통해 '선입견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우리는 '한 번 찍히면 끝'이라는 파괴적이고도 절박한 명제 앞에 쉽게 이성을 내어준다.


그런데 실수가 그렇게 곧바로 만회될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 실수를 하고 거의 곧바로 만회했거나 더 큰 공적을 올린 케이스는 2002년 월드컵 16강, <한국 : 이탈리아> 전에서 전반에 페널티킥을 실축한 안정환이 역전 골든골을 넣은 것 말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에서 누군가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면, 일단 정신이 나가고 몸이 굳어버리기 때문에 그날은 경기 내내 실책을 연발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은 문책성이라는 명분으로 멘탈 보호를 위해 해당 선수를 교체해 주기 십상이다. 그렇게 보면 당시 안정환을 바꾸지 않은 히딩크도, 멘탈을 추스르고 골든골을 작렬시킨 안정환도 정말 대단한 거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혼나는 일은 일종의 날씨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준비 없이 비를 만난 것처럼 예측불가의 연속. 어떤 때는 비온다는 예보에 우산을 갖고 나가도 비가 안 올 때가 있고, (사실 큰 실수를 저지를수록 생각보다 크게 안 혼나고 넘어가는 경우가 의외로 잦다) 어떤 때는 갑작스레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를 맞기도 한다.


그럴 때는 비를 피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감기 걸리지 말고,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로 맞을 비는 맞고 얼른 집에 가서 샤워하고 푹 자야 한다. 뭔가를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만회하려 발버둥치다 더 큰 수렁에 빠지는 경우를 정말로 여럿 봤다.


특히, 직장 내 본인의 위치가 높은 사람일수록(예를 들면 사장님한테 깨진 본부장님) 더더욱 몸을 사려야 한다. 거기서 뭔가를 만회하려고 했다가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산이 아닌 줄 알고도 '이 산이 아닌개벼' 삽질에 총동원될 수도 있다. 위에서도 아래서도 인심을 잃으면 갈 곳이 없다. 더욱이 일개 실무자들이야 한 번 혼나면 말 것을, 몸이 무거운 계약직 임원들은 괜한 똥볼을 차 집에 가는 상황도 종종 보았다. 아무튼 제발 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






핀치에 몰리면 잠시 볼을 멈추거나 라인 아웃을 시켜 쉬는 시간을 마련해 보자. 정 답답해 미칠 것 같으면 동료들이나 선배들, 후배들에게라도 좀 물어보라. 주관적, 객관적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나. 내 일이라 주관적이고, 남 일이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기꺼이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다.


물론,


맞을 비는 맞아야지 뭐,
최대한 조금만 맞고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



이상 가는 묘수가 잘 없을 거다.




* 표지 이미지_왼쪽은 영국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모하메드 살라, 오른쪽은 다들 아시다시피 손흥민.

표지 이미지의 맥락을 소개하자면, 두 선수 모두 리버풀과 토트넘에서 각각 입지가 약해지자 손흥민은 이를 인정하면서 다른 프리미어리그 경쟁 구단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다른 리그(미국 MLS)로 떠나 토트넘에서 레전드 대접을 받으며 금의환향했고, 모하메드 살라는 언론 인터뷰에서 감독 탓을 하며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둥, 구단이 자기를 배신했다는 둥 똥볼을 차서 리버풀 레전드로서의 커리어를 망칠 위기에 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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