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 설상 종목 사상 첫 금메달
직접 본 올림픽에서 가장 압도적인 선수를 꼽으라면 2008 베이징 올림픽 장미란과 2018 평창 올림픽 윤성빈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선사한 선수는? 바로 2016 리우 올림픽에 출전한 남자 펜싱 에페 종목의 박상영이다.
일명 “할 수 있다”좌로 알려진 박상영은 언더독이었고,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 세계랭킹 3위 선수였다. 박상영의 금메달을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펜싱 중 에페는 검으로 신체 전 부위를 찌르면 점수가 되고, 동시 유효타도 양 선수 모두에게 득점을 부여하므로 경기 중 한 점이라도 앞서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15점이면 이기는 경기에서 스코어가 14:13이라고 하자. 이때 양 선수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동시 유효타가 나온다면 무효처리 되는 것이 아닌, 두 선수 모두에게 1점이 부여되어 15:14로 기존에 앞선 선수가 이기는 식이다.
박상영이 마지막 3세트를 앞두고 맞은 스코어는 13:9, 물론 박상영이 9점이었다. 이쯤 되면, 특히 에페 경기에서는 포기할 만한 점수차다. 하지만 관중석에서 우리말로 "할 수 있다"는 함성이 들렸고, 이를 들은 박상영은 "할 수 있다"를 혼잣말로 되뇌며 3세트에 돌입한다.
결국 14:10, 매치 포인트에 몰린 박상영은 기적처럼 동시타조차 허용하지 않고 한 점씩 따라붙어 동점을 만들었고, 끝끝내 짜릿한 역전승으로 금메달의 주인공이 된다. 이 경기는 한국 올림픽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로 손꼽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새벽, 대한민국의 17세 소녀가 이를 능가하는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세계랭킹 1위로 올림픽을 맞은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여자 국가대표 최가온 선수. 이 종목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한국계 미국인(실제 양친이 모두 한국인이다) 클로이 김이라는 선수인데, 무려 2018년 평창 올림픽, 2022년 베이징 올림픽 2연패를 한 선수고, 이번에 3연패에 도전하는 이 종목 GOAT다.
최가온 역시 클로이 김을 우상으로 여기며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에 입문했고, 올시즌엔 클로이 김의 부상으로 인해 올림픽 직전 열린 세계선수권에서는 한 번도 맞대결을 펼친 적은 없다.
예선에서 몸을 사리며 6위로 결승에 진출한 최가온 선수. 금메달을 향해 결선 1차 시기, 힘차게 날아오른다.
하지만 경기장 컨디션은 실로 최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설상 종목이지만 눈이 오지 않는 편이 경기를 치르기엔 훨씬 낫다. 고글을 쓰고 보드를 타기 때문에 눈이 내리면 시아에 방해가 돼 점프 시점과 착지 지점을 제대로 분간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출발한 최가온은 첫 점프를 성공시키고 기세를 몰아 두 번째 점프에 나섰으나, 파이프 엣지에 착지하며 머리부터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다.
제발 일어나기만 해라
간절한 외침이 필요할 만큼, 5분이 지나도 최가온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마 뇌진탕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스스로 일어나 피니쉬 라인까지 완주했지만 100 점 만점에 10점이라는 낮은 점수를 받게 된다. 점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소녀에게는 선수 생명이 훨씬 중요했다. 다음 올림픽에도 충분히 나설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나 역시 그녀의 기권을 바랐고, 최가온은 기권을 선언했다.
같은 시각 열린 쇼트트랙도 별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잠들려다, '혹시나' 하고 2차 시기를 기다려 봤다. 아니 근데 최가온이 나온 것이다.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수준이었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기회라 기권을 번복한 정신력은 대단하지만, 눈발은 더욱 거세게 흩날렸고, 무엇보다 육체적인 제약을 넘어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클 것이라 좋은 연기를 선보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2차 시기 역시, 첫 점프조차 성공하지 못한 최가온. 이미 1차 시기 88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획득한 클로이 김의 우승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으며, 최가온이 3차 시기에 나오지 않는다 한들,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주관방송사인 jTBC 역시, 최가온이 더 이상 어렵겠다 판단한 듯, 메인 중계를 쇼트트랙으로 넘기고, 스노보드 경기는 스포츠채널로 이관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보자
는 심정으로 3차 시기를 기다렸는데 아니 이 선수가 1, 2차 시기를 그렇게 실패한 선수가 맞나 싶을 만큼 담대하게 날아오르는 거다. 눈이 많이 내려 경기장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본인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난도 기술에서 한두 레벨 내린 기술까지만 선보였다. 실제로 거의 모든 선수들이 다 넘어졌기 때문에 완주만 해도 메달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복안이었다.
경기를 무사히 마치고, 점수를 기다리는 그녀의 눈에서는 아쉬움과 감동의 눈물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모두가 그녀의 완주 자체만으로도 박수를 쳐 주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대반전이 일어났다. 심사위원들은 무려 90.25라는 후한 점수를 선사하며, 그녀를 단숨에 1위로 등극시킨 것이다. 경기장 컨디션을 감안해 그녀의 연기가 결코 모자라지 않았으며, 특히 다양한 기술을 구사한 점, 그리고 점프 높이가 월등했던 점을 인정한 합당한 점수였다.
마지막 3차 시기에서 대역전극을 장식한 최가온은 더 큰 눈물을 쏟아냈다. 결국 모든 경쟁자들이 경기를 끝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선수는 최가온에게 1위를 내준 최가온의 우상, 클로이 김. 클로이 김 역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술을 구사해야 역전할 수 있었기에 과감한 시도에 나섰지만,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최가온의 기적적인 금메달. 1차 시기 뇌진탕, 그리고 기권. 다시 번복. 그리고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대역전극으로 금메달을 따낸 이는 고작 17세에 불과한 소녀였다. 내가 이 장면을 라이브로 본 것이 아직까지는(?) 올해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시상식에서도 절뚝이며 포디움에 올라선 17세 소녀의 눈물 어린 미소, 그리고 자신의 우상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받는 모습까지. 모자란 잠을 도파민이 몇 배는 채워준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