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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댄스 Jun 21. 2024

시간에도 위아래가 있다*

힘 있는 자에게 귀한 것은 돈보다 시간이다

팀장이 휴가나 출장, 외근을 나가면 곧잘 '방학'에 비유하곤 한다. 팀장이 자리를 비웠다고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심리적으로 여유가 생겨서 업무처리가 더 잘 되는 경우도 있다 ㅋㅋㅋㅋ


윗사람들이 없다고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데드라인이 촉박한 일이나 부재 시 급하게 의사결정할 상황이 생기면 전전긍긍하기 일쑤다. 특히 팀장이 휴가일 경우, 참 난감한 상황이 많다. 실무자로서 의사결정해서 선조치 후보고할 일은 그렇게 한다 쳐도(이런 일을 가려내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반드시 긴하게 팀장의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우, 카톡으로 전화로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다.


팀장이 휴가인 팀원에게 연락하는 것이 미안해할 일이듯, 반대의 경우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책임의 무게로 직책수당이라는 것을 더 받겠지만, 보통 팀장의 직책수당이 그 무게감에 비해 넘치는 건 차치하고, 합당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팀장은 그나마 조금 편하게 얘기할 수라도 있지(아닌 분들도 많으시죠? ㅠㅠ) 그 위로 가면 정말 난감할 때가 많다.






예전 회사에서 광고심의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 광고 론칭일은 정해져 있는데, 언제 우리가 하는 일이 여유 있게 심의 기간까지 빼놓고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나. 보통 해당 비즈니스를 총괄하는 협회에서 심의를 하곤 하는데, 한 번 삐끗하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되는 일정이다. 이렇다 보니 심의 업무는 초읽기 싸움이다.


문제는 협회도 협회지만, 내부 부서 결재가 선결돼야 한다는 데 있다. 그 회사는 이 업무의 결재 권한이 임원들에게 있었다. 정말 급하게 진행되는 심의 일정 속에서 특정 임원의 만만디 정서 때문에 속이 타들어갔던 경험을 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행인지(?) 나는 빠듯한 업무와 어울리는, 엄청 급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만큼 업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납기인데, 납기가 촉박해질수록 이성은 안드로메다로 향한다. 그날 오후 6시까지 협회에 심의를 올려야 하는데, 마지막 최종 결재를 담당하는 임원이 오후 5시 30분까지 결재를 안 해주면 정말 정신줄을 놓게 된다.


5시 35분, 5시 40분, 5시 45분, 46분, 47분......


내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사내 메신저에 해당 임원상태가 초록불(자리에 있다는 뜻)임을 확인하고 몇 번을 대화창을 열었다 닫았다, '안녕'까지 썼다 지웠다, '안녕하세요, XX팀 OOO입니다'를 써두고 엔터를 누를까 말까 망설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돼 버렸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XX팀 OOO입니다.
정말정말 송구하오나 심의 결재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정확한 답변은 기억 안 나지만 재구성해 보자면,


이렇게 다이렉트로 저한테 얘기하는 게 무례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나도 일정이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 급하게 요청하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하면 되잖아요?


나도 미리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 물론 결재는 완료됐고, 이후 나는 또라이로 유명세를 떨쳤다. '하아...... 그래 일만 잘 되면 됐지. 아니, 근데 자기가 임금님이야? 급하면 얘기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다 월급값에 포함된 것이라 생각했다.






높은 사람들의 힘을 가장 단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권위? 돈? 나의 답변은 시간이다. 모든 재화 중에 가장 한정된 재화,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재화. 시간이다. 힘이 센 사람일수록,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시간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편으로는 높은 사람들이 짠하기도 하다. 시간을 아껴 쓰라고 비서도 붙여주고, 돈도 많이 주지만 어쨌든 제한된 시간을 본인을 위해 쓰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누고 쪼개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같이 천하디 천한 불가촉천민급 일벌은 시간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할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억만금을 준다 해도 내 시간을 나눠주느라 허덕이는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억울한 것은 받는 돈에 비해 시간이 남아도는, 그 시간을 자신에게만 쏟는 월루(월급루팡) 어르신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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