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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댄스 Jun 24. 2024

보랏빛 숨소리조차 음률이 되다

나를 이소라의 팬으로 만든 결정적인 순간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성별이나 장르에 따라 답변이 달라지겠지만 통틀어 한 명만 말할 수 있다면, 단연 이소라다.


라디오 키즈라 자부하는 나는 물론 H.O.T.나 S.E.S., 신화, god도 좋아했지만 이소라, 유희열, 윤종신, 이적, 박정현의 노래로 청소년과 성인 그 어느 사이쯤 있는 감수성을 채워가고 있었다. FM 91.9MHz에서 밤 10시마다 나오는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공부하는 시늉을 하곤 했는데, 당시 DJ였던 이소라의 입담이 어마무시하게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후로 <정오의 희망곡>, <FM 음악도시> 등 라디오 DJ로, <이소라의 프로포즈> MC로서도 친숙한 이소라가 내게는 참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뮤지션으로 인식됐다. 그녀의 신보가 나오면 늘 용돈을 모아 꼭 정품 CD로 샀던 기억도 남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평생의 이소라 팬으로 만든 결정적인 첫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 이 장면을 굳이 얘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던 것이, 그녀 개인에게는 큰 상처였을 기억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든싱어>에서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른 노래라 그랬다며 덤덤히 소회를 밝혔기에, 시간이 치유해 줬으리라는 믿음으로 써본다.



정황적으로 이때 내가 본방을 보게 된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당시 새 앨범을 산 후, 첫 라이브 무대를 본인이 진행하는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한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보지 않았을까.


세상에 이걸 아직도 갖고 있다니...무려 24년이나 된 앨범이다



두 번의 라이브 중단이면 부르는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부르지 않는 것이 낫다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PD가 엄청 악독했거나 엄청 인간적이었거나, 혹은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라이브 클립이 탄생했다. 이 노래를 라이브로 부른 적은 잘 없기에 귀하디 귀한 무대이며,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게 정말 절실한 사랑과 아픈 이별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해 준 장면이다.


이 무대 이후, 나는 그녀의 열렬한 팬이 되었으며 콘서트를 제외하고 매스컴을 통해 그녀가 등장한 모든 장면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누군가 그랬다. 진짜 가수라면 '숨'을 잘 써야 한다고. 그녀의 노래를 듣자면 침묵이 때론 발성보다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곤 한다. 그녀가 내뱉는 호흡과 목소리는 보랏빛 파동으로 바뀌어, 금세 공간을 점유하고 만다. 보라색 잉크를 담아 채워놓은 가습기를 틀어놓은 것만 같다고 할까.


자고 일어났을 때 베갯잇을 눈물로 적실 수 있는 감수성과 좋은 음악에 대한 고집스런 철학이 그녀를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그녀는 슈퍼스타가 되는 대신 아티스트로 남을 수 있었다. (데뷔 앨범을 100만 장 판매한 신인을 슈퍼스타의 재목으로 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사실 그녀는 생각보다 꽤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녀의 성정으로 미루어 감히 출연할까 싶은 경연부터 예능형 음악프로그램인 <판타스틱 듀오>와 <히든싱어>, 그리고 버스킹 콘셉트의 <비긴 어게인>, 심지어 <이소라의 두 번째 프로포즈>라는 뮤직 토크쇼의 진행자로 나서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보컬만큼이나 진행솜씨와 입담을 많이 볼 수 없는 것이 더욱 아쉽다.


그녀를 두 번째, 폭력적으로 마주친 순간은 <나는 가수다> 무대다.


<바람이 분다>로 포문을 연 그녀의 첫 나가수 무대는 김건모 탈락과 재도전 사태로 얼룩졌다. 대중에게 그녀는 숨마저 음악으로 만드는 섬세한 아티스트가 아닌, 정해진 룰을 외면하고 떼를 쓰는 철부지로 각인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늘 예상을 뛰어넘는 무대로 성난 여론을 잠재웠으며, 그 프로그램의 수호자였던 나조차도 '나가수' 특유의 고음 경연에 지쳐가던 그때,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그래서 새로웠던 무대를 선사한다.




원곡인 송창식의 <사랑이야>가 주는 설렘의 정서를 오롯이 이소라 특유의 애절한 톤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깊이 있고 다채로운 마음결을 품위 있게 읊어주었다. 그녀 역시 본인이 시나브로 '세게' 부르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자각한 이후 준비한 첫 무대라고 했다. 이 무대는 읊조림이 외침보다 더욱 큰 파장을 일으킨 순간이며, 개인적으로는 나가수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무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이소라의 결정적인 세 번째 장면 역시 <나는 가수다> 무대였다.


내가 늘 놀랐던 순간은 그녀의 퇴장이 아닌, 등장이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매스컴을 멀리하는 듯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언제고 출연해 왔다. 그리고 그 출연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번아웃(?) 내지는 피로감을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체감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녀의 퇴장은 언제고 놀랍지 않게 돼 버렸다.


경쟁이 싫어 늘 꼴찌를 원했고 탈락 결과를 받아들이며 덤덤히 나가수 무대를 떠난 그녀를 다시 나가수 무대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엇보다 소위 '나가수형' 가수를 양산해 내며 프로그램의 인기는 높아졌지만 개인적으로 나가수에 대한 관심이 식어갈 무렵이었다.



호주에서 열린 패자부활전 성격의 나가수 특별경연에 이소라가 참여할 줄은 몰랐다. 이소라의 무대와 별개로 이 경연은 전체적으로 장관이면서도 가관이었다. 고음을 넘어서는 고음과 전조, 강렬한 무대매너의 향연만이 꼭 현지 교민들을 위한 해외에서 열린 가요무대 식의 팬 서비스라고 생각했던 것만 같다. 그 와중에도 컨디션 난조를 보인 그녀는 준비했던 노래를 포기하고 무대 4시간 전, 새로 바꾼 노래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원곡 이현우)를 부르기 위해 영혼의 파트너인 The Story(이승환)의 피아노 단선율 하나에 숨과 음을 얹는다.


<사랑이야>를 뛰어넘어, 이 무대야말로 나가수 최고의 무대를 경신했다고 단언한다. 당시 호주의 스산한 밤공기와 바람 외에는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던 반주와 보컬이 어우러진 황홀한 순간이었다. 더욱 완벽한 스토리는 이 무대가 꼴찌인 7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예상컨대 이소라는 7위가 되길 바랐을 것 같다. 그저 본인의 노래만큼은 줄 세우는 고민 없이, 눈을 감고 귀로 즐길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모두가 경연을 했고, 혼자서 공연을 했다.


이소라의 무대를 7위로 꼽은 호주 교민들을 폄하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가수들 역시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고, 음악은 취향이지 결코 수준이 아니라고 믿는다.


훗날 K-Pop 스타에 참가한 정승환이 이 노래를 경연곡으로 선택했을 때 확실히 눈치챌 수 있었다.


너도 소라 누나 엄청 좋아하는구나?






마지막으로 클립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무려 <이소라의 프로포즈> 1회 영상이다.



이소라 최고의 히트곡 반열에 둘 수 있는 <처음 느낌 그대로>의 작곡가 김광진이 출연해 이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다. 김광진의 <처음 느낌 그대로>는 담담함 속에 극대화되는 슬픔이라면, 이소라의 <처음 느낀 그대로> 참다 끝내 터져 나오는 슬픔이다. 요즘엔 이렇게 잘 부르는 사람들이 안 나오니 아쉽고,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잘 안 나오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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