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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댄스 Aug 23. 2024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을 것*

작사가 김이나의 작품들

내가 작사가 김이나의 팬이 된 것은 그녀의 저서 <나를 숨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을 읽고 나서다. 노래에 어울리는 글을 짓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인지라 단어 하나의 뉘앙스에 대한 감수성이 짙다.


이 책에서 한 문장이 남았다.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을 것


미움받는 은 필연이다. 혹자는 미움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제안했지만, 나는 미움의 정도를 줄일 수 있는 '노력'에 더욱 끌린다. 노오력하면 조금 덜 미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짧다면 짧은 40년 가까운 내 삶으로 증명해 왔다.


김이나는 확실하게 사랑받는 방법을 안다. 타고난 영민함 덕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부딪쳐 가며 쌓은 경험치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감대 가득한 정서에 자신만의 특별한 영감과 표현력을 한 스푼씩 곁들인다면 그녀처럼, 그녀의 노랫말처럼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1. 가인 - 피어나 (2012)




나 말이야
못다 핀 꽃 한 송이야
그런 날 피워낸 sunshine 매끄러운 motion Chemical blue ocean

(중략)

You're the magic, oh
You're the wonderland
자꾸 너를 부르다 잠들었던 별이 쏟아지던 아름다운 그 ah ah ah


처음에 이 노래를 접했을 때 가사 때문에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노래와 가인의 보컬이 무척 좋았다. (당시에는 김이나라는 사람도 몰랐고, 당연히 작사가가 김이나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이 노래를 들으며 작사의 예술성과 실용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예술성에 천착해 너무 난해한 메시지를 담는다거나 좋은 의미만 담은 노랫말이 좋은 노랫말은 아닐 것이다. 작사에서 의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발음이다. 이 노래에서 후렴구를 들어가기 전 'Speak Up'을 반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소절은 의미보다는 멜로디와 어울리는 발음을 통해 청각적 쾌감을 주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 밖에도 Rhyme과 파열음, 받침이 없는 낱말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운용의 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작사는 예술적 감수성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조사하다 보니, 세상에! 이 가사는 여성의 첫 오르가즘에 대해 쓴 곡이라고 한다. 메타포가 너무 은근해서 전혀 알지 못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들으니 정말 그렇다. 하지만 유교걸, 유교보이 님들도 이 노래를 마다하실 필요는 없다. 방송 3사의 심의 통과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뿐더러, 온전히 가인의 보컬과 멜로디, 퍼포먼스만으로도 충분한 명곡이다. 브라운아이드걸스까지 통틀어 가인이 관여한 노래 중에 최고로 꼽고 싶다.



2. 태연 - 11:11 (2016)



It's 11:11
오늘이 한 칸이 채 안 남은 그런 시간
우리 소원을 빌며 웃던 그 시간
별 게 다 떠오르게 하지 니맘 끝자락처럼

(중략)

계절틈에 잠시 피는 낯선 꽃처럼
하루틈에 걸려있는 새벽별처럼
이 모든 건 언젠가는 다 지나가고 말겠지


4시 44분에 우연히 시계를 보면 불길해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11시 11분에 우연히 시계를 본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 소원을 빈다’는 모티브에서 창작한 이 노랫말은 김이나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명곡이다. 찰나의 시각(時刻)을 시각(視覺)적으로, 다시 그 시각을 이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순간으로 계승해 내는 번뜩임과 유니크한 표현력이 다 담겨있다.


김이나의 이런 천재성에 감탄할 새도 없이, 이내 무드에 점령당하고 마는 그런 노래다. 하루가 넘어가기 전, 한 칸 못미치는 남짓의 틈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체념뿐이다. 꽃은 계절의 틈에 피었다가 지고, 새벽별은 하루의 틈에 빛났다가 스러지듯, 사랑 역시 지나가버리고 말 것을 알고 있다. 아니까 슬프고, 알기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역설.


이 모든 이야기는 11시 11분에 시작됐다. 11시 11분에 우연히 시계를 본 김이나는 이 노래라는 행운을 만난 것만 같다.


무엇보다 가사의 모든 정서를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태연의 목소리. 흰 도화지 같다가도, 총 천연색 무지개 같다가도, 아련한 흑백 사진 같기도 하다. 시대와 세대를 넘나들며 사랑받을 만한 목소리다.



3. 임영웅 - 이젠 나만 믿어요 (2020)



궂은 비가 오면
세상 가장 큰 그대 우산이 될게
그댄 편히 걸어가요

걷다가 지치면
내가 그대를 안고 어디든 갈게
이제 나만 믿어요

(중략)

이 세상은
우리를 두고 오랜 장난을 했고
우린 속지 않은 거야

이제 울지 마요
좋을 땐 밤새도록 맘껏 웃어요
전부 그대 꺼니까


나는 트로트에 큰 거부감이 없다. 특히 국내에서 BTS만큼의, 어쩌면 능가하는 인기를 자랑하는 임영웅 같은 보컬리스트가 트로트계의 슈퍼스타라고 한다면 아티스트의 인기도, 장르의 호황도 모두 납득이 간다. 김이나의 가사가 아니었어도, 나는 따뜻하고 부담 없는 임영웅의 목소리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를 이 노래로 뽑았을 것이다.


김이나는 똑똑한 사람이다. 예능이나 토크쇼에서 그녀의 활약상을 보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역시 말도 잘하고 생각이 깊구나’ 느낄 수 있다. <이제 나만 믿어요> 노래 얘기를 하다 갑자기 김이나의 똑똑함을 언급한 이유가 뭐냐고? 작사가 김이나는 장르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소리와 의미를 적확히 가려 쓴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트로트의 멜로디 구성은 타 장르에 비해 단순한 편이다. 멜로디의 단순함과 더불어 주청취층이 시니어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직설적인 표현이나 직접적 비유, 쉬운 상징으로 점철된 가사가 많다. 작사가 김이나가 트로트라는 장르를 만나면 유연하게도 그에 걸맞은 작법을 보여준다. 앞서 소개한 <피어나>나 <11:11>과 달리, 이 노래의 메시지는 무척 직설적인 편이다. (트로트 신동 유산슬과 함께한 <사랑의 재개발> 역시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감수성은 놓지 않는다. 그녀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 노래에 대한 에피소드를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우승한 날이 공교롭게도 임영웅 아버지의 기일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 착안해서 "이 세상은 우리를 두고 오랜 장난을 했고 우린 속지 않은 거야"라는, 오직 임영웅만 알아들을 수 있는 위로의 메시지를 담았다. 임영웅이 이런 감성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어 불렀으니, 노래가 좋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4. 성시경 - 이음새 (2021)



지우려 하지 않아도 쓰여지는게 너무 많아서
오래된 기억은 감춰지곤 해
길었던 우리 얘기도 몇 개의 단어만 남겨지다
작은 점이 되어 갈지도 몰라

(중략)

거기 사랑이 있었다고 그게 우리의 증거라고
그리 특별하지 못한 이음새 같은 순간 속에
여기 네가 있던 자리가 아물어 버릴까 봐
이따금씩 난 일부러 멈춰서 기억을 이어본다


원래 나는 ‘-새’라는 접미사를 참 좋아했다. 모양새, 본새, 담음새 등. '사이'라는 말의 준말이기도 하고, '모양'을 뜻하는 순우리말이기도 하다.


<이음새>는 노래는 성시경의 다른 노래에 비해 유명한 노래는 아니다. 우연히 제목이 나를 사로잡았고, 나만 아는 명곡으로 오랜 기간 내 플레이리스트에 담겨 있는 노래다. 다만 이 노래의 가사를 김이나가 썼을 줄은 몰랐다. 김이나 하면 연상되는 가수는 아이유, 브라운아이드걸스, 박효신 정도였는데. 도통 그녀와 성시경 사이의 이음새를 찾을 수 없었기에, 이 노랫말 역시 무척 좋았지만 김이나의 작품이라 생각지는 못했다. (뜻밖에도 김이나의 데뷔곡은 성시경 3집 수록곡 <10월에 눈이 내리면>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다시 가사를 보았다. 김이나는 시간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만 같다. 오래 지나지 않은 기억은 문장의 형태로 남아있다. 누구에겐 애석하게도, 어떤이에겐 다행스럽게도 시간은 우리를 언제나 망각으로 데리고 간다. 시간이 오랠수록 문장의 시퀀스는 단어로 분절되고, 단어는 의미를 잃고 점으로 흩어진다. 기억을 잊지 않으려면 의식적으로 점을 이어 단어를 만들어야 하고, 단어를 붙여 문장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잇는 일에 마음을 할애할 때 추억이 생성된다.


알고 들으니, 더욱 저릿하다.





김이나가 쓴 노랫말, 그중에서 히트곡만 추려도 셀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의 선곡에 아쉬움을 표할 것만 같다. 오로지 나의 취향에 따라 선곡한 것이니 뒤늦은 양해를 구한다.


이 노랫말들은 그녀의 말을 닮았다.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을만한 가사들이다. 아니, 그녀의 타고난 감수성과 직업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함 덕분에 아티스트와 팬들에게 미움받지 않고 정확한 사랑만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앞선 명제를 수정한다. 미움받는 사람은 필연이다. 그러나 대충 미움받고자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미움받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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