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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댄스 Jun 11. 2024

우문현답은 있어도, 현문우답은 없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어가 좌우한다

인터뷰라는 형식은 콘텐츠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수준 높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대가, 석학, 셀럽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신건강에 좋은 순도 100% 통찰 농축액을 마시는 것만 같다.


좋은 인터뷰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부분 좋은 인터뷰이(Interviewee)를 섭외하는 것이 가장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좋은 인터뷰이를 섭외하는 것보다 더 앞선 것, 더 중요한 것이야 말로 '좋은 인터뷰어(Interviewer)'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이를 가리지 않고, 재미와 의미를 모두 뽑아내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좋은 인터뷰어다.




1. "마지막으로 제가 물어보지 못한 것 중에 하고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영화 주간지 <씨네21>의 편집위원이자,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김혜리 기자의 팬이 된 것은 성시경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FM 음악도시>의 코너지기였을 때다. 중저음으로 조곤조곤 영화와 배우를 이야기해 주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섬세함을 느꼈다. 좋은 직업인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문장이 말을 닮은 건지, 말이 문장을 닮은 건지 모르겠다. 간결하고도 사려 깊은 그녀의 말과 문장은 쉬웠지만 깊었다, 아니 쉽고도 깊었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그녀의 인터뷰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내 삶에 필요한 좋은 문장과 통찰이 있으리라는 확신과 기대가 있었고, 실현됐다.


이 책은 새 책으로는 구할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한 자산이 됐다



저서 <진심의 탐닉>을 읽으면 인간의 예측과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게 된다. 인터뷰이에 대한 선입견을 다정하게 무너뜨리니 말이다. 연예인에 대한 인터뷰에서 '재미'를 기대했다면 '깊이'를 던져주고, 석학이나 정치인에게 '깊이'를 기대했다면 '유머'를 던져주는 식이다. 미필적 고의보다는 배려의 역설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입체적이다. 단 하나의 서술어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명제에 충실하듯, 인터뷰이에 대한 철저한 예습과 특유의 다정함, 그것을 간결하게 풀어내는 화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인터뷰이조차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끌어내고야 만다.


마지막으로 제가 물어보지 못한 것 중에 하고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그녀가 늘 마지막 질문으로 삼는다는 이 한 마디는 인터뷰이에 대한 배려, 어쩌면 집착의 사려 깊고도 섬세한 표현이 아닐까. 언제부턴가 내 삶의 모토로 자리 잡은 '나는 내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기억의 총합이다'라는 그녀의 한 마디는 인터뷰라는 콘텐츠를 떠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2. '당신을 알고 있다'와 '당신을 알고 싶다' 그 사이


비록 큰돈을 버는 일은 못했지만, 다양한 커리어를 쌓은 덕에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 이어령 선생님을 만나뵐 수 있었다. 심지어 그분을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이미 돌아가실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였음에도, 두 눈과 귀를 의심할 만큼 다분히 열정적이셨다. 방대한 지식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인문학, 철학, 종교학, 역사학 소재는 시대와 분야를 넘나들어 잘 짜인 이야기가 됐다. '이런 것을 지적 유희라 하는구나!' 경탄과 존경의 연속이었다. 허락된 시간을 훌쩍(한 시간쯤?) 넘어서야 건강상의 이유라는 아이러니한 이유로 인터뷰가 끝날 수 있었다. (더욱 건강하셨을 때는 정해진 미팅시간보다 2~3시간 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물색없어 보이지만 인터뷰어 김지수 기자를 이야기를 하고자, 이어령 선생님과의 일화를 꺼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인터뷰어로 주저 없이 꼽은 사람이 바로 김지수 기자다. 실제로 이어령과 김지수의 인터뷰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김지수의 문장은 세련됐다.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패션지 에디터로서의 경력이 표현의 세련미를 더해주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 볼 따름이다. 나의 문해력이 떨어지기에, 그녀의 문장 중 가끔 단번에 해석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내 곱씹어볼수록 기표와 기의가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표현이라 감탄하게 된다.


시인 나태주, 배우 류승룡, 코미디언 송은이,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
트렌드데이터 과학자 송길영, 소설가 이민진, 경제학자 장하준......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 섭외된 인터뷰이를 눈에 띄는 대로 나열해 봤다. 유독 그녀의 인터뷰이 리스트를 보면 그야말로 커리어도, 국적도 불문이다. 좋은 인터뷰어들의 공통점이겠지만 특히 인터뷰어로서, 김지수 기자의 사전조사가 얼마나 치밀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정보를 파악하고 질문지를 짜는 데 보통 2~3일 정도가 걸린다.
품이 많이 드는 편이다. 인터뷰이에 대해 주어야 하는 인상은
'당신을 알고 있다'와 '당신을 알고 싶다' 사이의 적정한 텐션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김지수 기자 인터뷰 中)

'당신을 알고 있다'는 인터뷰이에 대한 존중을, '당신을 알고 싶다'는 독자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인터뷰이에도, 독자에게도 치우치지 않으려 애쓴다. '신념을 가지면 안 된다는 신념', 이 원칙은 그 어떤 저명한 석학에게도 예외가 없다. 어쩌면 인터뷰어라는 직업은 '에디터'로서의 본능이자 적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그녀에게 천직이 아닐까.


이 두 권의 책은 인터뷰의 정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인터뷰이와의 관계에 얽매인다거나 미안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죠"


라디오 PD를 준비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라디오 PD는 전문 장르가 없다는 사실이다. TV PD들은 예능/시사교양/드라마 PD로 장르에 따라 따로 채용하지만, 라디오 PD는 그냥 라디오 PD로 뽑았다. 개편에 따라 음악방송을 맡았다가 바로 다음 날 시사프로를 맡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주로 새벽에 나오는 달콤한 노래와 언어로 만드는 방송만을 생각한 내가 크게 한 방 맞은 순간이었다. (적성에 안 맞는 시사 공부를 해야 하기도 했다.)


최고의 인터뷰어로 손꼽히는 김현정 앵커의 공식 직업은 라디오 PD다. 입사 후 그녀는 매일밤 10시에 방송되는 <꿈과 음악 사이>라는 음악프로그램을 맡았다. 이후 자의는 아니었지만 임시로 시사 프로그램의 대타 DJ를 맡은 것이 <뉴스쇼>라는 프로그램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방송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인터뷰 콘텐츠를 지면으로 내보내는 것과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시간'이다. 지면 인터뷰는 상대적으로 섭외와 대담, 퇴고에 시간적 여유가 주어진다. 반면 방송 인터뷰는 매일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고, 제한된 시간 내에서 양질의 질답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그녀는 늘 좋은 인터뷰를 끌어낸다. 수많은 시사 프로그램 중 <김현정의 뉴스쇼>가 탑이 된 이유다.


시사 프로그램이다 보니 정치인을 인터뷰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인터뷰어로서 김현정 앵커에게 주목하는 부분은 질문에 성역이 없다는 점이다.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정중하지만 돌려 묻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정치인들이 출연을 꺼릴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직설은 신뢰와 진정성을 담보한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많은 정치인들이 본인의 영향력을 검증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뷰이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보인다는 점에서 김혜리 기자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지만, 그저 인터뷰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독자와 인터뷰이를 양 끝점으로 둔 선분이 있다면 김혜리 기자는 인터뷰이 편에, 김지수 기자는 그 중간지점에, 김현정 앵커는 독자의 편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는 청취율이라는 중요한 지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현정 앵커는 바로 오늘, 많은 대중들이 가장 궁금해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가장 궁금한 점을 물어봐야 한다.


때때로 그녀는 '바보처럼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는 핀잔 어린 피드백도 받는다고 한다. 이에 대한 답변이 참으로 현명하다.


진행자는 바보 역할을 해야 한다 (<publy> 인터뷰 中)


사상과 가치를 이야기하는 인터뷰가 있고, 정의와 진실을 이야기하는 인터뷰가 있다. 김현정 앵커의 인터뷰는 후자다. 이쪽의 목소리와 저쪽의 목소리를 같이 들려주고, 듣는 이에게 판단의 근거를 충분히 전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민감한 질문에 주저함이 없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무례하다고 꾸짖지 않는다. 개인적인 미안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그녀의 단호함이야말로 좋은 인터뷰의 원동력일 것이다.


어도어 민희진 대표는 문제의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CBS로 향했다. 본인의 말을 가장 신뢰감 있게 실어나를 수 있는 채널로 <김현정의 뉴스쇼>를 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수가 참 높다



무엇보다 이렇게 매일,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그녀와 <뉴스쇼> 팀이 보여준 성실함에 경의를 표한다.




우문현답은 있어도, 현문우답은 없다.


앞으로 내가 만들 일은 잘 없겠지만, 인터뷰는 커뮤니케이션을 전제하는 콘텐츠라 깨닫는 바가 많다.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 인터뷰를 볼 사람을 늘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좋은 인터뷰어이자, 커뮤니케이터의 필수 자질이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상대방에게 던질 수 있는 좋은 질문 하나를 만들기 위한 섬세하고도 치열한 고민이 곧, 만남의 질과 사귐의 깊이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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