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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댄스 Jun 03. 2024

의미의 무의미, 무의미의 의미*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무라마키 하루키. 이 거장의 이름 앞에 몹시 주눅이 들어 제대로 읽은 책이 얼마 없다. 비겁한 변명일까, 어리석은 핑계일까. 대략 20년 전,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후 처음으로 그의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브런치스토리에 기거하고, 기고하는 글벗들 덕분이리라.


어쩌면 불안할 수도,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나는 하루키스트가 아니다. 「노르웨이의 숲」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져 버려 내용보다 대략적인 심상만 남아있다. 주인공은 외톨이와 외골수 기질이 있고, 요즘 말로 아싸스러운 면이 있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에로티시즘이 작품 전체에 드리우며 몰입도를 높여준다. 내가 아는 하루키는 고작 이 정도다. (이마저도 정확하지는 않으리라)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을 계획이라면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책과 상관없이 읽을만한 글주변은 못됩니다.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684p)



소년(앞으로 소설의 주인공 '나'를 소년이라 칭하겠다)이 만난 소녀는 첫사랑이자 모든 것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다'는 소녀의 도발적인 언사와 그렇지 못한 행동(?) 때문에 소년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는 일에 모든 생을 할애한다.


나의 첫 번째 사랑은 소년처럼 순수해 보였지만, 실은 순진한 거였다.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몰라서 하지 못한 수많은 언어들, 몸짓들. 그립지만 아쉽지는 않다. 그래서 첫사랑에 모든 것을 건 소년의 행보는 도통 납득이 가질 않는다.


고작 열일곱 때 만난 첫사랑을 다시 만나려 이렇게까지 한다고?! 차라리 목숨을 걸라면 걸지. 가족과 친구라는 관계, 동물과 식물이라는 익숙한 자연(환경), 내 몸과 뇌가 겪어냄으로써만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이라는 물리 법칙마저 내려놓고 차원의 이동을 감행할 자신이 내겐 없다. 하루키에게도 묻고 싶다. 자신이 있냐고. 주인공 소년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고.


하루키는 '첫사랑의 순수함'이라는 이미지를 소설 안에서 구축해 나갈 세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쏟은 대부분의 에너지는 벽 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쓰였다. 에너지를 그렇게 쏟기로 마음먹은 것은 첫사랑을 찾아 나서는 소년의 지고지순한 열망이 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자, 사랑과 그에 대한 상념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것이 하루키의 의도였는지, 그에 맞게 읽어나간 것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하루키는 별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 안에 나오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작가 후기에 등장하는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랬듯, 소설에서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흐릿하다. 소년의 육신과 그림자는 무엇이 진짜배기인지 구별해 내기 쉽지 않다. 독자인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소년의 의식(Ego)뿐이었다. 주인공의 내면과 환경은 도시의 벽처럼 끊임없이 형상을 바꿔나가기에, 나는 소년의 세상이 꿈인지 생시인지 현실인지 가상인지 분간해 낼 도리가 없었다.


문득 데카르트가 떠올랐다. '생각'(a.k.a. 사유)이 실존의 유일한 이유이자 근거라고.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관념이자 언어는 의식이 아닐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대로, 영혼이 바뀐 두 사람의 정체성을 외모보다 의식에 두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소년의 자의식을 좇아 즐거운 여정을 만끽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러나 확실한 의식.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 이상의 결핍을 갖고 있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주인공 소년, 아마 온전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다른 세계를 동경했던 소녀, 살아있을 땐 가족을 잃고 죽어서는 육체를 잃어버린 고야스 씨, 마음을 닫고 활자에만 천착하게 돼 버린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 섹스를 할 수 없어 사랑에 관한 한 끊임없이 스스로와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었던 카페 주인. 모두 어딘가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불가해한 세계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데 이만큼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가 빠져 모난 캐릭터가 모여야만 불완전한 세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사랑한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떠올려 본다.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은 한 두 가지 결핍을 가지고 있다. 나는 소설에 등장한 어떤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갖고 있지 않고, 또 무엇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자문해 보며 글을 읽었다. 무수한 무엇이 떠올랐지만 치명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소설 속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덤덤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참 좋아하는 속담이다. 결국 부재는 존재를 증명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내게 없는 무엇들은 그것이 필요할 때만 중요했다. 결국 내게 없는 것들 중에 진짜 중요한 무언가는 없는 셈이다. 모든 있는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없음'만은 필요에 의해 '있어야' 하는구나. 하루키를 읽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다 해보네.






소년은 소녀가 만든 도시에 진짜 소녀가 있다는 말만 믿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제 눈에 상처를 내고, 쓰라린 고통을 참으며 해가 지기만을 기다린다. 해가 지면 꿈 읽는 이로서 소녀를 만날 수 있다. 벽 너머의 세계에서 속삭였던 사랑의 맥락과 기억은 벽 안의 세계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생면부지처럼 대하는 이 소녀를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넘어온 이 세계는 소년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렇게 사랑해 놓고도 사랑받지 못하는 이 세계는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를 찾아왔지만 의미가 없다. 고작 불확실한 벽 하나만 지나도 의미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의미는 타고나는 것일까, 부여하는 것일까. 내가 무심코 건네기도, 혀끝에서 멈춰 세우기도 했던 수많은 말을 떠올린다. 말은 의미를 가장 담기 쉬운 그릇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말은 의미를 전달하기 가장 어려운 수단이 되어버린다. 소년은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을 찾으러 온 아버지와 형제에게 자신이 소녀와 만든 도시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다 멈춘다. 분명히 소년에게, 소녀에게, 그리고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에게는 의미 있는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겐 의미를 잃은 헛소리에 불과한 이야기다.


소년은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말과 의미를 차단한다. 나는 수도 없이 보았다. 담박하게 건넨 말이 곡해되기도 하고, 포근한 말그릇에 독(毒)을 탄 저의를 담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말은 떠나는 순간 의미를 갖는 동시에 의미를 잃는다. 아무리 하얗다고 말해도, 누리끼리하다고 받아들이는 네 앞에선 장사가 없다. 누리끼리한 것을 하얗다고 치켜세우거나 하얀 것을 누리끼리하다고 깎아내리는 말하기도 있다. 이렇게 의미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에 이르러야 비로소 무의미가 의미를 띤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이렇게 의미 없는 것들.






고백하건대 그동안 독서가 취미라고 거짓말했다. 독서는 결코 나의 취미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텍스트를 교과서처럼 해독하려는 강박이 있다. 이젠 텍스트에 콘텍스트(Context)라는 강박까지 더해졌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도 모자라 행간까지 읽어내야 온전히 독해했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책 읽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이번엔 좀 편하게 마음먹고 읽어보자고 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하루키니까? 하루키 책은 수능 지문 읽듯이 읽지 않아도 용서받을 것만 같았다. 잘못을 저지르지도, 나를 용서해 줄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잡상가답게, 잡상을 떠올리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아마 앞으로는 좀 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지난 해는 너무 소진하는 데에만 집중했기에, 채워 넣을 시간이 간절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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