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벙글 스레드 생태계
스레드를 읽다 보면
가끔 문장보다 말투가 먼저 도착할 때가 있다.
그 말투는 의미보다 빠르고,
내용보다 선명하며,
때로는 글쓴이의 세계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짧은 글 환경에서는
지식의 양보다 지식의 ‘형식’이 우선시 되기 쉽다.
그래서 어떤 타임라인 구간에서는
깊이를 가진 문장보다
깊어 보이는 문장이 더 많은 힘을 얻는다.
나는 이 현상을
‘권위를 빌리는 말투의 달콤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를 빌리는 말투’는
누군가가 권위적으로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위가 있을 법한 형식을 빌려
문장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
나는 누군가를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문장이 권위를 얻는 방식을 관찰하고자 한다.
권위를 빌리는 말투는
무지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조금 알고 있는 상태”에서
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사람은 무엇이든
막 배웠을 때 더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말하는 동안
자기가 이해한 세계가 한 번 더 정리되고,
그만큼 단단해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피드의 일부에서는
막 배운 개념들이
내용보다 먼저, 말투의 형태로 소비되곤 한다.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은 결국 인정 욕구로 움직입니다.”
“사회학에 따르면 개인의 선택은 구조가 결정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독립적인 사람은 어릴 때 거절을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이 문장들은
틀린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판정’이 가능한 형태로까지
도착하지 않은 채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생긴다.
문장 자체보다
문장이 기대는 권위가 먼저 작동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걸
학문 자체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심리학도, 사회학도, 연구도
원래는 단정부터 하기보다
전제와 맥락을 확인하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개념의 경계를 정하고,
적용 범위를 말하고,
예외와 반례를 남겨 둔다.
문제는 학문이 아니라
학문을 호출하는 방식이다.
“심리학에 따르면”이라는 문구가
때로는 설명의 시작이 아니라
설명을 끝내버리는 마침표가 된다.
그리고 내가 자주 보게 되는 건
‘학문이 검증한 결론’이라기보다
‘검증이 있었을 것 같은 말투’다.
어떤 이론인지, 어떤 연구인지, 어떤 조건에서 나온 말인지가
생략된 채로도 문장은 굴러간다.
물론 이런 말투가 항상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근거가 생략된 채 권위만 남는 순간을 말하고 싶다.
권위를 빌리는 말투는
왜 이렇게 쉽게 달라붙을까?
첫째,
이 플랫폼의 구조상
문장을 해체할 시간이 부족하다.
사람들은 깊이를 검토하기보다
“깊어 보임”을 먼저 판단한다.
출처를 확인하기보다
출처가 있어 보이는 톤을 신뢰한다.
둘째,
권위를 빌리는 말투는
정체성을 빠르게 구축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람’, ‘배운 사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 한다.
그 말투는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장 빠른 문장 장치다.
셋째,
불안할수록 사람은
단정적인 문장을 선호한다.
불안은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면
문장은 단단해진다.
나는 타임라인을 훑으며
권위를 빌리는 말투가 나쁜 태도라고 느낀 적은 없다.
오히려 인간적이다.
지식을 아주 조금 아는 상태는
사람에게 미묘한 고양감을 준다.
자신이 세계의 결을 조금 이해한 것 같은 기분,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말을 통해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안정감.
이 감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단지 이 형식의 플랫폼은 그 과정을
너무 빠르고 투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권위를 빌리는 말투의 또 다른 특징은
‘형식’ 자체가 정체성처럼 기능한다는 점이다.
학문 이름을 걸고,
개념을 한 조각 가져와 재배열하고,
결론을 단정형으로 마감하는 방식.
이 형식들은
실질적인 의미 전달보다
“나는 이런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선언에 가깝다.
이 구조에서는
선언이 의미보다 빠르다.
그래서 지식의 내용보다
지식의 형식이 더 오래 남는다.
물론,
짧은 문장 안에서도
출처와 조건을 남기는 글이 있다.
그런 글은 대개 더 조심스럽다.
결론보다 조건을 먼저 붙이고,
“어떤 맥락에서”, “어떤 경우에”, “어떤 연구에서는” 같은
단서를 남기는 문장들을 남겨 둔다.
하지만 자주 유통되는 권위의 말투는
그 단서들을 생략한다.
학문이 원래 요구하는 절차는 빠지고,
학문의 이름만 남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런 문장 앞에서 멈춘다.
“이 말이 틀렸냐”가 아니라
“이 말이 검증 가능한 형태로 말해지고 있냐”를 묻게 된다.
학문은 원래
단정형보다 조건형에 가깝다.
하지만 짧은 글은
조건을 빼고 결론만 남긴다.
권위를 빌리는 말투는 달콤하다.
정확함보다 자존감이 먼저 충족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현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흥미롭다.
이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말투를 길들이는 방식에 대한 관찰일 뿐이다.
사람은 원래
자기 언어를 통해 자신을 만든다.
그 언어가 철학적이든,
심리학적이든,
혹은 단정적 말투이든 상관없다.
다만 이런 형식의 공간은
그 언어를 너무 쉽게
정체성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그 고정된 말투가 오래 남으면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기 쉬워진다.
그리고 그 욕망은
권위를 빌리는 말투를 다시 강화한다.
이 반복이
권위를 빌리는 말투를 하나의 패턴으로 만든다.
다만 이 패턴은
내가 관찰한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은 결론이라기보다 질문이다.
우리가 신뢰하는 게 내용인지, 말투인지.
혹은 말투가 먼저 신뢰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같이 생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