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편 - 이북리더기와 명품가방

명품가방도 제 싫으면 그만

by 로미코샤Romicosha

에피소드


해외 생활이 길다 보니 종이책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전자책은 필수인데, 휴대폰으로 오래 읽다 보면 눈이 금세 피로해집니다.

저는 안구건조증이 심해 인공눈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넣습니다.

심하면 다래끼가 나기도 합니다.


그런 저에게 이북 리더기는 신세계였습니다.

장시간 읽어도 눈의 피로가 훨씬 덜했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이북 리더기 액정은 e-ink 특성상

‘설탕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약하다는 겁니다.

커뮤니티에는 “가방에 넣었는데 옆에 있던 열쇠에 긁혀 산산조각 났다.”는

사연이 꾸준히 올라옵니다.


그래서 저는 자리를 비울 때마다 액정 위에 스펀지를 덮고,

파우치에 넣어 서랍 속에 모셔둡니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이미 고양이가 리더기를 밟고 지나가다

액정이 와자작 깨지는 동영상이 무한 재생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제 고양이는 위험한 전과가 있습니다.

노트북 모서리를 물어뜯다가 남편한테 엄청 혼났는데도

기회만 되면 또 물어뜯습니다.

핸드폰을 물거나, 책상 위 태블릿에 펀치를 날린 적도 있습니다.

리더기라고 무사할 리 없겠죠.


비슷한 이유로 저는 명품 가방을 사지 않습니다.

(사실은 살 돈도 없지만요.)


오래전 친구가 명품 가방을 새로 샀다며 자랑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 친구의 가방은 확실히 고급스럽고 예뻤습니다.

그런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내내

그녀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댈 때도 조심조심,

테이블에 닿을까 봐 덜덜 떨더군요.


“혹시 누가 부딪히면 어떡하지? 스크래치 나면 큰일이야.”


보통 사람도 저렇게 애지중지하는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박증이 없는 사람도 저런데... 나는 더 피곤하겠구나.’


들고 다니기 위해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게 뻔합니다.

게다가 고양이가 물어뜯는 상상을 하다 보면

결국 수납장에 모셔두는 제 모습이 선명히 그려집니다.

차라리 사지 않는 게 낫습니다.


결국 제 손에 남은 건 안심이 아니라,

불안의 또 다른 모양이었습니다.

아마 제 강박의 진짜 적은 ‘고장’이 아니라,

고장이 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일지도 모릅니다.




심리 분석


이건 ‘사고 예방 강박’이 물건 보호와 결합된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스펀지와 파우치는 안전 행동,

명품 가방을 아예 사지 않는 것은 회피 행동이죠.


문제는 고장 그 자체가 아니라,

고장이 날 수도 있다는 상상입니다.

실제 확률은 낮지만, 머릿속에서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장면이 무한 반복되며

안심보다 불안이 강화됩니다.


결국 불안의 진짜 대상은 물건이 아니라,

불확실성 자체입니다.




병맛 팁


이북 리더기를 사용할 땐, 책상 위에 쿠션을 올린 후 안치하기

보관할 때는 아예 금고에 보관하기

외출 시에는 파우치 대신 담요에 싸서 들고 다니기

혹은 파우치 안에 또 다른 파우치 넣어두기 (파우치계의 마트로시카)

명품 가방은 아예 더스트백째로 들고 다니기 (이게 진짜 하이패션)




마무리


결국 저는 리더기를 아끼지만,

아끼는 만큼 불안도 커집니다.

친구의 명품 가방처럼, 제 리더기도 제게는 보물이자 걱정거리입니다.


강박은 소중한 것을 지키려다

오히려 제 자유를 가두는 역설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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